내 정체성 지키며 친구들과 소통하는 ‘무지개교실’
성소수자 청소년 위한 대안적 교육공간
자기 정체성 구축하고 사회성도 배우고
또래 친구와 함께 검정고시 준비하기도
지난 8월8일, 2024년도 제2회 검정고시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저마다의 이유로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거나 중단한 사람들이 검정고시를 치르기 위해 시험장에 모여들었다. 학교 밖 성소수자 청소년인 제드(17·활동명) 역시 이번 검정고시 응시자 중 한 명이다. 중학교 때 자퇴를 한 제드는 지난해 여름부터 검정고시에 도전했지만, 혼자서는 시험장에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응시만 하고 번번이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무지개교실 2기로 참여해 지난 4개월 동안 또래 친구들과 함께 검정고시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시험 당일에도 서로 “긴장하지 말자” “이 문제는 어떻게 풀었냐” “잘 봤냐” 등의 안부와 응원을 나누면서 무사히 시험을 끝낼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제드는 용기를 내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었다.
제드가 학생으로 참여한 무지개교실은 시민단체 ‘노동·정치·사람’과 청소년 트랜스젠더 인권 모임 ‘튤립연대’가 학교 밖 성소수자 청소년을 위해 만든 대안적 교육 공간이다. 자신을 지킬 자원이 아직 부족한 청소년에게 학교는 교육 공간이기 전에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고 사회성을 배우는 울타리다.
하지만 많은 성소수자 청소년이 제도적 차별은 물론 공기 같은 차별과 배제의 시선을 겪으며 학교 밖으로 밀려난다. 오히려 성소수자 차별 금지를 명시한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이 갈수록 거세지고,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성소수자’라는 단어가 삭제되는 등 백래시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된다. 청소년 트랜스젠더 실태를 담은 책 ‘당신의 성별은 무엇입니까? : 대답해도 듣지 않는 학교를 떠나다, 청소년 트랜스젠터 보고서’(민나리, 김주연, 최훈진 저·오월의봄)에 따르면 설문조사에 참여한 청소년 트랜스젠더 224명 중 68.8%는 교사의 혐오 발언을 들은 적이 있었으며, 21.9%는 학업을 중단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보호 못 받는 아이들 위한 울타리
학교를 떠난 성소수자 청소년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더욱 섬처럼 고립되기도 하고, 학업이나 일을 안정적으로 꾸려가지 못해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지개 교실 기획자이자 도덕 과목을 담당하는 교사 꽁치(23·활동명) 역시 자퇴 경험이 있다. “15살 때 자퇴를 했고, 정체성이 집에 알려지면서 가출도 했다. 가출 후에 중국집 알바를 하기도 하고, 친구들이 주는 돈으로 겨우 생활하면서 지냈다. 당시 “교복 입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는 꽁치는 이후 학교에 재입학했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3개월 만에 다시 자퇴를 했다. 꽁치는 자신처럼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 트랜스젠더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많은 성소수자 학생들이 트랜스젠더를 위한 화장실 시설을 마련해달라고 한다거나, 최소한 이런 차별은 받지 않게 해달라고 학교와 교육청에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젠더 표현에 솔직하려고 애쓰고, 동시에 학교에 매우 애정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학교는 정작 아이들을 간절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요.”
무지개교실은 학교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밀려난 성소수자 청소년들을 위한 작지만 안전한 울타리다. 지역과 현장에서부터의 진보 정치를 실천하는 ‘노동·정치·사람'과 학교 밖 트랜스젠더 문제로 활동하는 청소년 트랜스젠더 인권모임 ‘튤립연대'가 시작한 사업으로, 후원금을 바탕으로 운영된다.
꽁치와 같은 고민을 지닌 이들이 “우리만의 교실을 만들어보자”라는 마음으로 뭉쳐 교사를 자처했고, 학교 밖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수소문해 모으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운영에 앞서 네트워킹 파티를 열기도 하고, 영상 제작 동아리도 운영했다. 학교 밖 성소수자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교실 운영의 밑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2023년 한 해 동안 다양하게 준비 사업을 한 끝에, 마침내 무지개교실 1기 학생 10명이 모였다. 2023년 12월 서울 이태원동의 레즈비언 바인 레스보스에서 개교 파티를 연 후, 2024년 제1회 검정고시를 함께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1기 활동을 종료 후 지난 7월부터는 무지개교실 2기를 꾸려가고 있다.
수평적 관계 속 자율 수업 진행
무지개교실에서 학생들은 ‘쟁이’, 공부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쟁이는 공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무엇이든 한다는 의미로 ‘-쟁이’에서, 탱이는 ‘담탱이’라는 말에서 따왔다. 기존의 위계적 호칭을 벗어난 수평적인 관계망 안에서 무지개교실 학생들은 수업을 듣고,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자습실에도 참여한다. 전시 관람이나 훌라 특강의 교양 수업으로 다양한 경험도 쌓고, 수업 후에는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거나 시간을 보내면서 유대감을 쌓아 나간다.
무지개교실 1기 ‘쟁이’인 초성(19·활동명)은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자퇴 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무지개교실을 만난 사례다. 서울에 비해서 더욱 폐쇄적이고 또래 성소수자를 만나기 어려운 지역 환경에서, 자퇴 후 힘든 시기를 보내던 초성은 비슷한 또래 친구들과의 만남이 절실했다. 무지개교실에서 바라던 대로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검정고시까지 치른 초성은 이후 부산으로 돌아가 입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직은 막연하지만, 대학 진학 후 자신과 같은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에 관해서 좀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다고 한다.
무지개교실에는 초성처럼 새로운 꿈과 학업에 대한 의지를 다시 갖게된 청소년들이 많다. 꽁치는 “무지개교실에 처음 올 때는 여러 친구들이 대학 진학 생각이 아예 없거나,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무지개교실에서 몇 개월을 보내면서 공부에 대한 마음을 갖거나 대학 진학을 꿈꾸기도 한다. 그런 모습에서 변화를 많이 느낀다”라며 무지개교실이 띄운 작지만 선명한 변화를 들려줬다.
자기 언어 찾으며 소통공간으로
무지개교실은 학교 밖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교실인 동시에, 또래와의 교류를 통해 사회성을 키우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이기도 하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학교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기표현을 하며 교류하기가 쉽지 않다. 성 지향성이나 성 정체성을 표현하면 차별의 대상이 되기 쉽고, 드러내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과 표현을 꼭꼭 숨기는 삶에 익숙해져 버린다. 학업 중단으로 학교라는 최소한의 울타리가 사라지면, 그마저의 교류도 할 수 없어 사회적으로 단절되기 쉽다.
꽁치는 이에 대해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자퇴 후 느낀 가장 큰 변화가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거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남들 앞에 서면 우물쭈물하게 되고, 말할 기회가 생겨도 침묵하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무지개교실은 말을 잃어버린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자기 언어를 찾아가는 곳이다. 학교에서 배제되는 경험을 한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고 있거나, 소통에 서툰 경우가 많다. 성소수자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끈끈한 관계가 절로 맺어질 리도 없다. 무지개교실은 이처럼 서툴고 모난 이들이 부딪히고 관계를 맺으면서 새롭게 빚어지는 학교였다.
제드 역시 무지개교실을 만나 혼자만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학교를 자퇴한 후 집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 제드는 무지개교실에서 소통하는 법을 많이 배웠다고 말한다. 함께 공부를 하고, 수업이 끝난 후에 맛있는 것을 먹고,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과정 하나하나가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에게는 당연할, 하지만 제드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었다.
2024년 제2회 검정고시를 잘 치러낸 무지개교실은 이제 2기 활동을 마무리한 후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도모할 예정이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안전하게 자기 사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오롯하다.
더불어 인터뷰에 참여한 무지개교실 구성원들은 무지개교실과 같은 안전한 커뮤니티가 많아지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무엇보다도 바라는 바는, 애초에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단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거나, 차별을 받지 않는 학교다.
어떤 성 지향성이나 성 정체성을 갖고 있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소통할 수 있는 학교, 그리하여 무지개교실과 같은 학교 밖 교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무지개교실이 가장 꿈꾸는 모습일 것이다.
박은아 객원기자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윤석열 정부 ‘친일’ 논란에 두쪽 난 광복절
- ‘채상병 의혹’ 김용현-‘홍범도 지우기’ 신원식…‘내부 재활용’ 안보라인
- 윤-MB, 한남동 관저서 만찬…원전 수출 덕담·당정 관계 논의
- 민주 “윤, 거부권 중독…공영방송 장악하겠다는 독재 선언”
- [단독] 관저 공사 불법 의혹...김건희 유관 업체 ‘7일 만에 14평 증축’
- [단독] 권익위 일부 위원들, ‘국장 사망’ 자체 진상규명 요구
- [단독] ‘251시간 묶여 사망’ 춘천 정신병원…‘코끼리 주사’ 매일 투약
- ‘전직 공안 검사’ 안창호, 인권법 반대하는데…인권위원장 지명에 비판
- 음식물쓰레기 재활용률 98%…“이런 나라 없다, 한국 배우자”
- 영웅이 온다...‘삼시세끼’, ‘뭉찬’ 등 잇달아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