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돌보미의 삼중고 우려 [유레카]

황보연 기자 2024. 8. 1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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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욱 화백

2022년 6월부터 시행 중인 가사근로자법(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은 가사노동을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청소·세탁·주방일과 가구 구성원의 보호·양육 등 가정생활의 유지와 관리에 필요한 업무’로 정의한다. 가사노동이 일반 가사업무와 아이돌봄으로 분화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둘 다 하기엔 업무가 과중하고 각각의 전문성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저출생으로 자녀를 한 명만 갖는 경우가 늘고 돌봄에 대한 관심이 커진 2005년을 전후로 업무 분화가 이뤄진 것으로 본다.

이런 추세는 한국표준직업분류 변천사에서도 드러난다. 표준직업분류는 1963년 만들어진 뒤, 국내 산업구조와 직업 변화상, 국제기준 등을 반영해 지금까지 8차에 걸친 개정을 거쳐왔다. 1966년 1차 개정 자료를 보면, 가사노동자는 ‘가사부’(家事婦)와 ‘가정사용인’으로 등재됐다. 가사부는 ‘개인가정에서 조리·세탁·소제(청소) 및 기타 잡역을 행함으로써 주부를 조력하는 일’을 맡는 사람으로, 식모·침모·유모 등이 세분화된 직업으로 함께 열거됐다. 그 외의 업무를 하는 가정교사 등은 가정사용인으로 별도 분류했다. 1970년 2차 개정에선 ‘가정부 및 달리 분류되지 않은 가사서어비스 종사자’로 한데 묶였다. 여기에는 하녀, 보모뿐 아니라 여관의 객실하녀, 배우의 의상을 담당하는 사람 등도 포함됐다. 숙박·음식점업의 발달로 가사서비스 개념이 개인 가정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게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분류가 더 세분화됨에 따라, 2000년 5차 개정부터 개인 가정과 숙박업소 등의 종사자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가사도우미’(Domestic Chores Helpers)와 ‘육아도우미’(Infant Rearing Helpers)가 별개의 직업으로 나뉜 것은 2007년(6차 개정)부터다. 여기서 육아도우미는 1960년대 단순히 젖을 물리던 ‘유모’와는 다른 개념으로, 베이비시터나 아기돌보미 등으로도 불린다.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지난 6일 아침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을 통해 입국한 뒤 버스로 이동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9월부터 시행되는 정부의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할 필리핀 노동자 100명이 지난 6일 입국했다. 그런데 이들의 업무 범위가 모호한 측면이 있어, 자칫 과중한 노동을 떠맡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입국자들은 모두 돌봄 자격증(Caregiving NC Ⅱ) 소지자다. 이 자격증은 돌봄 업무와 어린이 발달과정, 응급조치 요령 등 780시간 이상 교육을 이수해야 딸 수 있다. 지난해 우리 정부는 가사와 육아를 모두 맡아주길 원했지만 필리핀 정부가 난색을 표하면서 양국 간 협상이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필리핀에선 두 직무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이중으로 부담을 지우려 한 것이다.

결국 한국 고용노동부와 필리핀 이주노동자부가 맺은 양국 간 양해각서(MOU)에는 아이 옷 입히기와 씻기기, 기저귀 교체, 음식 먹이기, 아이 방 청소 등 아이돌봄 업무를 기본으로 하되, ‘동거 가족을 위한 부수적이고 가벼운 가사서비스’가 추가됐다. 정부가 선정한 서비스 중개기관인 ‘대리주부’는 부수적 업무의 예시로, 6시간 이상 서비스의 경우 어른 옷 세탁과 식기 설거지, 청소기·마대걸레를 이용하는 바닥청소 등은 가능하고 쓰레기 배출이나 어른 음식 조리 등은 할 수 없다고 안내했다. 하지만 부수적 업무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두고 갈등이 불거질 소지가 여전하다. 이와 관련해,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책 결정자들이 현장에서 직무가 어떻게 분리되고 있는지 몰랐던 게 아닌가 싶다”며 “만일 이용자가 더 많은 서비스를 요구하고 가사관리사가 이에 응할 경우, 적절한 추가 요금을 지불하도록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정부는 ‘이용자 준수사항’ 교육 영상에서, “필리핀 사람들은 잘 웃고 남에게 화를 내지 않는 특성이 있어 늘 밝고 친절하다”고 안내했다. 혹여 이들이 ‘감정노동’까지 요구받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것은 기우일까.

황보연 논설위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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