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 세력, 엔 매도 85% 급감"…엔저 국면 대전환 [김일규의 재팬워치]
"엔 캐리 트레이드 일부 청산"
30년간 세 번째 엔 캐리 '붐'
1998년·2007년엔 붐 꺼지며 엔고
투기 세력에 의한 엔저 압력이 약해지고 있다. 30년간 세 번째 나타난 ‘엔 캐리 트레이드’ 붐이 꺼져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연초부터 이어진 엔저 국면이 전환점을 맞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엔 매도 포지션 급감
12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집계한 지난 6일 기준 헤지펀드 등 비상업부문(투기 세력)의 엔 매도 포지션은 1만1354계약(1419억엔)으로 나타났다.
전주 대비 6만2106계약(85%) 급감하며 2021년 3월 이후 약 3년 5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나타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속하면서 미국 중앙은행(Fed)이 2022년 3월 금리 인상을 시작하기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엔 매도 포지션은 금리가 낮은 엔화를 조달한 뒤 달러 등 고금리 통화로 운용해 차익을 얻으려는 ‘엔 캐리 트레이드’ 동향을 보여준다. 엔화를 팔아 고금리 통화로 바꾸는 거래이기 때문에 이 거래가 활발할수록 엔화 매도 압력이 강해진다.
7월 중순 달러당 161엔대까지 치솟았던(엔화 가치 하락) 엔·달러 환율은 지난 5일 한때 달러당 141엔대까지 하락(엔화 가치 상승)했다. 이 과정에서 CFTC 데이터 기준 엔 매도 폭이 ‘제로(0)’에 가까워졌다. 엔 캐리 트레이드가 일부 청산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 이유다.
미국 골드만삭스는 CFTC 데이터를 통해 “엔 캐리 트레이드는 90% 정도 축소됐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JP모건체이스는 6일 현재 50~60% 정도, 이후 70%대까지 환매가 진행됐다는 견해를 밝혔다. 스위스 UBS는 청산 규모를 40% 정도로 보고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가 수백조엔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정확한 데이터는 없다. 일본 정부나 일본은행조차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거래 규모를 유추할 수 있는 데이터 중 하나는 일본은행이 공표하는 외국은행 재일(在日)지점의 본지점 계정(자산)이다. 해외 펀드 등이 이곳에서 자금을 빌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 3월 기준 13조5000억엔을 넘어 2022년 1월 대비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세 번의 엔 캐리 트레이드 붐
이번 엔 캐리 트레이드 붐은 1998년, 2007년에 이어 지난 30년간 세 번째 나타난 현상이다.
1차 엔 캐리 트레이드 정점은 1998년이다. 일본 국내 금융 불안에 따라 일본계 은행이 해외에서 달러를 조달할 때 가산금리를 지급해야 하는 ‘재팬 프리미엄’이 발생했다. 미국 대형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등 많은 펀드가 앞다퉈 엔 캐리 트레이드에 뛰어들었다.
LTCM은 저렴하게 조달한 자금으로 투자금을 원금의 수십 배로 불려 러시아 국채 등을 대량 매입했다. 1998년 6월 미·일 양국이 공조 개입을 실시했지만, 엔화 매도에 제동이 걸리지 않았고 그해 8월에는 달러당 147엔까지 엔저가 이어졌다.
2차 엔 캐리 트레이드 정점은 ‘리먼브러더스 파산 쇼크’ 이전인 2007년 전후다. 미국은 2006년까지 17회 연속 금리를 인상해 2년 동안 4%포인트 이상 올렸다. 유럽에서도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금리 인상이 이어졌지만, 일본은 금리를 동결했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확대됐고 유럽에서는 엔화 표시 주택담보대출을 대출하는 움직임마저 일어났다.
1차 엔 캐리 트레이드는 러시아 위기에 따른 LTCM의 파산, 2차 엔 캐리 트레이드는 2007년 서브프라임 부실 표면화에 따라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엔화는 강세로 돌아섰다.
3차 엔 캐리 트레이드 붐을 일으킨 것은 코로나19 확산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공급망 혼란으로 식량과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고, 미국이 인플레이션 대책으로 금리를 급격히 인상했지만 일본 금리는 마이너스권에서 움직였다.
◆5일 닛케이지수 폭락의 범인은
3차 엔 캐리 트레이드는 지난 5일 닛케이지수가 사상 최대 낙폭을 기록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누적된 엔 캐리 트레이드 환매가 급격한 엔고를 불렀고 주가 하락과 공명 현상을 일으켰다는 분석이 많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미·일 통화정책의 방향 전환이다. 7월 31일 일본은행은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금리 인상을 결정했다. 우에다 가즈오 총재는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추가 금리 인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미·일 금리 차이가 좁혀지면 엔고 압력이 커져 금리 차익도 줄어들게 된다.
예상치 못한 일본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에 엔 캐리 트레이드를 하던 헤지펀드는 서둘러 엔화 매도·달러 매수 포지션을 정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급격한 엔고는 일본 주식 매도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이후 일본 주가 상승은 역사적 엔저에 따른 일본 기업의 실적 개선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엔화 매도와 일본 주식 매수를 결합한 ‘재팬 트레이드’로 높은 수익을 올린 해외 헤지펀드도 많았는데, 이를 멈추면서 엔화 강세와 닛케이지수 하락이 동시에 진행됐다는 분석도 있다.
엔 시세는 12일 달러당 147엔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닛케이지수는 지난 9일 0.56% 오른 35,025에 마감하는 등 안정을 되찾았다는 평가다. 당분간 급변동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본 주식·외환시장의 관측이다.
도쿄=김일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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