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아리셀 참사…우리 안의 차별·혐오 직시해야[기고]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은 일반적으로 위험하고 힘들다. 적어도 내가 이주노동자 진료소에서 만나는 분들의 직업환경은 그러하다. 긴 노동시간, 무거운 물건을 나르느라 힘든 일들, 계속되는 반복 동작들, 그리고 소음, 먼지, 냄새에 찌든 사업장들이 그러하다. 실제 이주노동자들의 산재 사망률은 같은 업종을 놓고 보더라도, 정주노동자들에 비해 훨씬 더 높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제공하는 기회라도 잡으려고 온 분들이지만, 그 기회는 아직까지 매우 불공정한 기회일 뿐이다.
한국이 파리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엘리트 체육의 과정은 일종의 국가가 운영하는 노동과정이다. 이러한 국가 운영 노동과정을 통해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다른 나라에서 화제가 되는 것을 보면, 한국의 위치가 세계적으로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경기 결과가 아니라, 경기에 임하면서 갖는 과정에 만족할 수 있는 사례가 많아진다는 것은 기회의 평등 속에 정의로움을 발견하고 그에 만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특히 국가 운영 과정에서 선수 보호가 국가 이익에 우선해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그만큼 인권 감수성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정의와 형평성에 대한 민감 지수가 높아진 대한민국 사람들이 아직 이주노동자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는 기회의 평등을 삶의 과정으로 돌아보지 못한다는 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단지 차별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에 상관없이 단지 현재의 위치만으로 차별이 당연해진 혐오의 시각에 오염돼 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그가 누구이든 주어지는 노동이 위험하고 힘들어도 상관없다는 편견이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무관심으로 포장된 혐오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던 시기가 있었다. 월남전 시기에는 한국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의사가 되기 위해 떠난 사람들이 의대 졸업생의 절반을 넘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 기지촌에서 만난 미국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사람도 많이 있었다. 용산 미군 121후송병원에 결혼을 앞둔 진료에서 의사와 환자로 만나기도 했다. 이들 의사와 기지촌 종사자들이 미국에 가서 겪는 이주노동은 한국에 있으면서 했을 정주노동에 비해 어떠했을까? 일부 회고록 등의 기록은 미국 주류사회보다 한국계 미국인 이민 사회로부터 더 큰 선입관에 시달렸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한편 한국계 미국인들의 자살률이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보다 더 높다는 통계는 좀 더 나은 기회를 얻는 것처럼 보이는 이주노동이더라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이 있다. 이들은 해방이 돼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 있어 재외동포가 된 사람들이다. 같은 한민족이 해방된 후 잠시 떨어져 있다가, 채 50년이 되지 않은 시점부터 한국에 들어와 대부분 이주노동자로서 생활한다. 단지 부모들의 선택으로 중국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주노동자가 됐다. 비록 이들의 노동은 이주노동이지만, 한국 사람이 미국에 건너가 겪는 이주노동보다 언어나 문화적으로 훨씬 덜 생경한 노동이다. 그렇다고 한국에 와서 위험에 처해 죽어야 했다면 그 과정을 공정하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안전하지 않은 일을 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안전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도 차별도 공정하지 않다. 단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 그리고 그들에 대한 혐오는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지속하기 위한 기제다. 특히 인도의 불가촉천민, 그리고 일본의 부라쿠민 등에 대해 그들이 현재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더라도 계속 다르게 취급하는 것은 명확한 편견이자 혐오이다. 그렇지만 한국에 이러한 인도식 불가촉천민, 혹은 일본식 부라쿠민이 없을까?
한국은 소위 국민국가 건설을 거치면서 신분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의 우리가 적어도 신분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식민과 전쟁으로 그 밑바닥까지 밭을 뒤엎었던 한국 사회에서 이제 와 내부의 이주노동자이든 아니면 외부로 떠난 이주노동자든, 천하고 더럽고 힘든 일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본래 신분이자 성격인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과 혐오가 점점 더 꿈틀대고 있다.
통계로 잡히는 꿈의 미국은 그 실상이 없다. 특히 꿈의 한국은 아직 그 개념도 없다. 아리셀 사태를 대하면서, 한국 언론의 침묵과 대비되는 영국 방송의 보도, 그리고 한국사회 전체의 무관심은 깊어만 가는 그 편견과 혐오의 깊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꿈을 깨고 우리 안의 차별과 혐오를 직시해야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다. 위험한 일을 해도 되는 사람이란 없다. 마치 국가가 관리하는 올림픽 선수들처럼.
오는 17일 ‘죽음과 차별을 멈추는 아리셀 희망버스’가 ‘혐오를 넘어 긍지’를 담아내고자 화성으로 출발한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명예교수(백기완재단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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