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넓은 우주’를 알아가는 일 그리고 나의 밥줄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4. 8. 1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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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상담뿐 아니라 집단상담, 교육, 워크숍 등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필자 제공

안주현 | 상담사
선생님, 편지는 처음이네요. 창밖으로 굵은 비가 묵직하게 내리꽂히는 깊은 여름밤이에요. 상담은 다 끝났는데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지 않아 펜을 들어봅니다. 이런 날이 가끔 있어요. 내담자의 이야기가 잘 소화되지 않는 날이요. 이런 날은 괜스레 딴청으로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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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실에서 내담자를 맞이하는 일은 설레는 일이에요. 내담자에게 이 시간이 환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일이고요. 하지만 방음 처리가 된 사각형의 밀폐된 상담실에서 내담자와 단둘이 마주 앉아, 그분이 풀어놓는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은 온전히 제가 홀로 감당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우리는 직업윤리상 비밀보장의 의무가 있으니 어딘가에 마구 털어놓을 수도 없고요.

물론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제게는 저를 가르쳐주신 많은 선생님과 제 상담자이신 당신과 함께 수련하고 있는 동료들이 있지요. 무엇보다 제게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내담자가 제 앞에 있고요. 하지만 가끔 제가 무대 위에서 듀엣 춤을 추고 있는 댄서처럼 느껴지곤 해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무대 뒤에 있어요. 제겐 해내야 하는 저만의 몫이 있잖아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그 순간 제가 해내야만 하는 그런 역할이요. 제가 삐끗하는 순간 제 파트너인 내담자가 다칠 수도 있으니, 50분이라는 시간 동안 피하지 않고 집중해서 감당해내야 하는 일이요.

내담자와의 내밀한 시간이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합니다. 필자 제공

중견 상담자인 저는 아직도 동료들끼리 모이면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섰을까? 하고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여기가 이런 곳인 줄 알았더라도 우리가 이 일을 시작했을까? 하는 질문도 하고요. 이 일의 가장 괴로운 점은 하면 할수록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어떤 일들은 경력이 쌓이면 좀 더 수월해지고, 능숙해지잖아요. 하지만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넓은 우주를 마주하는 일처럼 느껴져요. 선생님들께서는 말씀하시죠. 잘할 수 없는 일이니 잘하려고 하지 말아라… 이런 선문답과 같은 말씀들이요.

그러니 우리는 계속 공부를 해야 하죠. 온갖 교육, 강의, 워크숍, 교육분석, 슈퍼비전, 관련 서적 읽기 등등. 실제 상담하는 시간뿐 아니라 거의 그에 상응할 만큼 공부와 수련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돈을 쓰게 되지요.

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초심 상담자들이 가장 크게 충격받는 부분이잖아요. 많은 상담자가 영리적인 목적만을 가지고 상담을 시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열정페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태도로 좋은 상담자의 자질을 판가름하려고 할 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요. 내담자의 복지를 위해 애쓰는 것이 상담자 자신의 복지를 무시하고 희생시켜야 한다는 말은 아닐 텐데도요. 여전히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많은 상담자가 계약직의 지위에 연봉 3천만원의 수입이라도 보장되는 자리를 찾아 헤맨다는 건 서글픈 일이에요.

지금은 상담사라는 직업이 많이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이 우리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죠. 하지만 실상은 우리를 하나로 대표할 수 있는 국가 자격증도 아직 없어요. 법적 지위가 없으니 그에 따른 법적 의무나 권한도 한계도 없고, 우리 자신을 보호할 법적 근거도 부족하고요. 상담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비상 상황 대응 시스템을 갖춰보려고 해도 법적 근거가 없으니 지자체에서 거부하면 그만이고요.

내담자가 중요한 만큼 상담자인 저희도 중요하잖아요. 상담은 내담자의 복지와 안녕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상담자에겐 생계를 이어 나가게 해주는 밥줄이기도 해요. 안전한 근무 환경에서 안정되게 내 할 일을 이어갈 수 있고, 상담의 유일한 도구인 나를 더 좋은 상담사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돈이 없어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저는 지금까지도 이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고, 다른 일보다 이 일이 더 좋아요. 사람을 알아가는 일, 존재와 존재로 내담자와 만나는 일. 가끔은 이 일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 돌이킬 수는 없겠다 싶어요.

선생님, 하소연 같은 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내일은 하늘이 아주 맑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삶은 다채롭고 다층적이네요. 조만간 찾아뵐게요. 건강하세요.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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