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고립된 호모 에렉투스, 호빗족으로 진화하다

곽노필 기자 2024. 8. 1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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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필의 미래창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에서 발견된 키 1m 고인류
100만년 전 도착해 30만년에 걸쳐 환경 적응한듯
2013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의 마타 멘게 유적지에서 발굴된 길이 8.8cm의 위팔뼈(상완골) 조각. 가이푸 유스케 제공

생물종의 진화 유형 가운데 ‘섬 왜소화’(Insular dwarfism)라는 것이 있다. 종의 평균 크기가 작아지는 ‘계통 왜소화’(Phyletic dwarfism)의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섬과 같은 고립된 지역에서 일어나는 진화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과학자들은 포식자가 없거나 자원이 부족한 경우, 작은 몸집이 생존에 유리한 경우에 이런 형태의 진화가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미 서부 해안 섬에 서식하는 무게 1~3kg의 섬여우, 아프리카 동쪽 마다가스카르섬에 서식하는 3cm 크기 카멜레온 등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2003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에서 처음 발견된 작은 고인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이런 일이 인간 사회에서도 일어났다는 걸 보여줬다.

플로레스섬 리앙부아동굴에서 발견된 이 고인류는 현대 인류와 비교해 키와 뇌가 유난히 작았다. 연구진은 뼈의 형태와 크기 등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키는 106cm이며, 뇌는 현대인의 약 3분의 1인 침팬지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했다. ‘호빗’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고인류의 키는 오늘날 4살 어린이와 비슷하다. 호빗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소인족이다.

동굴에선 뼈, 치아와 함께 사냥한 동물을 도축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석기 도구도 발견됐다. 과학자들은 동굴 바닥을 분석한 결과, 이 고인류가 이곳에 살았던 시기는 6만~10만년 전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호빗족의 조상은 아프리카를 떠난 초기 현생인류일까, 그 이전의 먼 옛날 이곳에 온 또 다른 고인류일까?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공동연구진이 2010년대 중반 리앙부아 동굴에서 75km 떨어진 마타 멘게에서 발견된 70만년 전의 유골 화석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내 7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다.

자바섬의 호모 에렉투스와 플로레스섬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발견 장소. 회색 지역은 빙하기 동안 해수면이 낮아져 땅이 드러난 곳이다. 가이푸 유스케 제공

결정적 단서가 된 위팔뼈 조각

연구진에 따르면 마타 멘게에서 발견된 유골의 주인공 역시 키가 아주 작은 호미닌(사람족)이다. 연구진은 호모 에렉투스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고인류가 리앙부아 동굴에서 발견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조상일 것으로 추정했다.

리앙부아 동굴 호미닌의 원류를 찾던 연구진은 2013년부터 마타 멘게에서 턱뼈와 두개골 일부, 치아 등을 잇따라 발견했다. 총 10개의 표본이 발견된 마타 멘게 유골 주인공은 2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최소 4명이었다. 그러나 팔다리에 해당하는 부위가 없어 신체 형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2015년 확인한 길이 8.8cm의 위팔뼈(상완골=어깨와 팔꿈치를 연결하는 뼈) 조각과 치아 2개에서 중요한 단서를 확보했다. 위팔뼈는 양 끝이 잘라져 나갔으나 그 크기와 형태, 구조로 미뤄볼 때 위팔뼈의 전체 길이는 20.6∼22.6cm이며, 뼈의 주인은 성장이 끝난 키 100㎝의 성인으로 추정됐다. 이는 리앙부아동굴의 호미닌보다 작은, 역대 가장 작은 인류의 유골이다.

또 치아는 50만~100만년 전 플로레스섬 서쪽 자바섬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의 것과 매우 비슷했다. 연구진은 이를 근거로 마타 멘게 호미닌은 호모 에렉투스에서 진화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타 멘게에서 발견된 위팔뼈 조각(왼쪽)과 리앙부아 동굴에서 발견된 다른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위팔뼈. 가이푸 유스케 제공

무엇이 왜소화 진화를 이끌었나

연구진은 이는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조상이 이 섬에 도착한 후 고립된 상태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매우 빠른 속도로 ‘섬 왜소화’라는 진화 과정을 밟았다는 걸 시사한다고 밝혔다. 리앙부아 동굴에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와 함께 발견된 멸종 코끼리 스테고돈도 몸집이 대륙 코끼리의 30%에 불과하다.

연구진은 호모 에렉투스가 호빗족으로 진화하는 데 걸린 기간을 30만년으로 추정했다. 섬의 부족한 식량 자원과 사자, 호랑이 같은 대형 포식자가 없는 점이 왜소화 진화를 이끌었을 것으로 본다.

유인원에서 분리된 뒤 키와 뇌가 훨씬 커진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한 때는 200만년 전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호모 에렉투스는 130만년 전 자바섬에 도착해 100만년여 동안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다.

연구진은 이들이 100만년 전 쓰나미나 거대한 폭풍에 휩쓸려 자바섬 동쪽의 플로레스섬으로 표류해 왔을 것으로 본다. 플로레스섬에서 약 100만년 전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석기 도구가 발견된 것이 추정의 근거다.

공동연구자인 오스트레일리아 그리피스대 애덤 브럼 교수는 “이번 연구는 호모 에렉투스가 100만년 전 외딴섬에 고립된 뒤 몸집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면서 '호빗' 이야기가 실제로 시작됐음을 강력히 시사한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작은 몸집은 호미닌을 환경에 잘 적응시키는 기능을 했으나, 약 5만년 전 플로레스섬에 호모 사피엔스가 도착하면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멸종을 촉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70만년 전 호미닌 화석이 발견된 플로레스섬 중부 소아분지의 마타 멘게 사암지대. 인근에서 최소 100만년 전의 석기 도구가 발견됐다. 애덤 브럼 교수 제공/더 컨버세이션

인간 진화는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이번 발견은 진화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공동저자인 가이푸 유스케 도쿄대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우리는 더 똑똑하고 더 큰 뇌를 갖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준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번 발견만으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가 호모 에렉투스에서 진화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호모 에렉투스가 정착해 진화했다면 플로레스섬에서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나와야 하지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 리앙부아와 마타 멘게에서 발굴된 어금니의 모양이 상당히 다른 점도 규명해야 할 부분이다.

국립오스트레일리아대의 데비 아규 교수는 마타 멘게 호미닌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종이거나 지금까지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된 몸집이 작은 호모 하빌리스의 조상 중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는 뉴사이언티스트에 “호빗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려면 더 많은 화석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논문 정보

https://doi.org/10.1038/s41467-024-50649-7

Early evolution of small body size in Homo floresiensis.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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