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준칙’ 도입이 능사 아냐…‘재정 운용’ 제 손발 묶을 수도

한겨레 2024. 8. 1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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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리포트] 류덕현의 건전 재정 신화를 벗긴다
6월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경실련과 민주노총, 민변 복지재정위, 참여연대, 한국노총 주최로 열린 \'감세중독 빠진 윤석열 정부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상속세 및 종부세 개편안을 규탄하며 적극적인 재정 역할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

지난 글에서 ‘건전 재정’의 개념에 내포된 한계와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대안 지표 개발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오늘날 흔히 쓰이는 재정건전성 가늠자인 ‘국내총생산에 견준 국가채무 비율’(국가채무비율)이나 ‘국내총생산에 견준 재정수지 비율’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다.

이번 글에선 한발 더 나아가 이런 기존의 재정건전성 지표에 기댄 재정 준칙의 한계를 논한다. 또 우리나라의 저출생·고령화 현상과 맞물려 지속가능한 재정 운용을 위해 필요한 재정 수입 확충 방안에 대해서 의견을 밝힌다.

재정 준칙 도입이 능사?

재정 건전화를 주장하는 쪽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는 재정 준칙(fiscal rules)이 한국에 시급하게 도입돼야 하는지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 재정 건전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재정 준칙이 효과적인지, 또 효과적이더라도 다른 부작용을 낳지 않을지를 곱씹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기획재정부는 국가채무 비율이 60%를 상회할 경우 관리재정수지 적자비율을 강제적으로 3% 미만으로 축소해 이 기준을 충족시키도록 하는 ‘한국형 재정준칙’을 제안했다. 채무의 급격한 증가를 방지하기 위해 재정수지 관리를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 재정학자나 전문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제안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뒤따른다.

‘왜 국가채무비율 한도가 60%인가?’ ‘왜 관리대상수지 적자비율 3%가 한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부는 내놓지 않고 있다. 이른바 ‘적정 채무비율’과 ‘적정 재정적자 비율’에 대한 논의다. 정부는 논거 없이 60%와 3%라는 허들을 내놨다. 물론 적정 채무비율 혹은 적정 재정수지 비율이 뭔지는 매우 복잡하고 어쩌면 정답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런 숫자를 내밀기까지의 논의와 추론 과정은 내놔야 한다. 이런 게 없으니 재정 준칙 도입이 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에 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재정 준칙 도입 자체에 대한 반대론 또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경제위기 때 불가피한 대규모 재정지출이 소요되는 경우 준칙의 발동은 당연히 유예돼야 할 것이다. 실업률이 치솟고 소득이 사라지는 와중에 재정 건전성을 지킨답시고 재정 준칙을 발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준칙을 도입하더라도 적용에 유연성을 가져야 하고 유연성의 기준도 함께 제시될 필요가 있다. 준칙은 말 그대로 법령적 사안인 터라 매우 경직적 속성을 지니기에 유연성 기준 마련은 매우 중요하다.

나아가 준칙 도입이 재정 운용의 경직성을 유발하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실증 연구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현대 공공재정관리론 분야의 석학이자 재정 준칙 도입 지지자이기도 한 미국 메릴랜드 대학 알렌 쉬크(Allen Schick) 교수도 재정 준칙이 재정 운용의 틀을 제약할 경우 재정 운용이 경직되면서 경기변동의 진폭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그는 재정 건전화를 지나치게 추구한 탓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2011년에 남유럽발 재정위기를 한 차례 더 겪었다고 반성적으로 회고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경직성을 띠는 재정준칙을 제정하기보다는 단기적으로 채무 증가의 속도를 완화시킬 수 있는 실효적인 조처를 도입해 이를 ‘암묵적 재정준칙’으로 운용하는 것이 한국 상황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재정 트릴레마를 아시나요

한국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논할 때 ‘재정 트릴레마’(fiscal trilemma)를 빠뜨릴 수 없다. 이는 ‘높은 복지수준’과 ‘낮은 국가채무 비율’, ‘낮은 조세부담률’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높은 복지수준’은 현재 우리 사회의 인구구조의 고령화와 현대복지국가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국가채무비율이든 조세부담률이든 둘 중 하나는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선진국 중 재정 트릴레마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없다. 국가채무 비율도 높이기 싫고 조세부담률을 높이는 것은 더욱 더 싫어하면서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정책 환상’(policy illusion)이다.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재정정책을 운용하면서 복지 향상을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로또가 당첨되기만을 바라는 모습인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당장 소규모 개방 경제인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신용도를 생각해서 국가채무 비율을 높여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기축통화국들은 국가채무 비율이 높아도 상관없는가? 아니다. 복지수준이 높은 선진국들은 기축통화국이든 아니든 국가채무 비율이나 조세부담률 둘 중 하나는 높다. 만약 우리처럼 비기축통화국인데 복지 지출 수준이 높고 국가채무 비율은 낮은 나라는 반드시 높은 조세부담률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축통화국이든 비기축통화국이든 모두 재정 건전화가 필요할 때는 이를 적극 추진한다. 1990년대 후반의 미국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독일이 그렇게 했다. 따라서 재정 트릴레마를 논할 때 기축통화국과 비기축통화국 구분은 그 의미가 작다고 생각한다.

2023년 말 한국은 전체 인구에서 65살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19%로 초고령사회 기준인 20%가 되기까지는 이제 겨우 1%포인트만 남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재정 규모가 많게는 국내총생산(GDP)의 50% 수준에 이르게 된 경우가 많은데(스웨덴, 프랑스 등) 이들 국가는 복지에 대한 지출 비중을 지속적으로 증가시켜오면서 재정 규모가 커진 것이다. 또한 복지 지출에 대한 재원 조달을 상당 부문 조세수입으로 해오는 과정에서 조세부담률(국민부담률)이 증가해왔다. 우리는 이제 국가채무 비율을 늘릴 것이냐 조세부담률을 늘릴 것이냐의 선택의 시점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재정 지속가능성, 증세에서 답을 찾아야하지만

1990년대 말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코로나19 위기 등을 겪을 때마다 소득격차는 물론이고 자산격차 또한 큰 폭으로 벌어져 왔다. 이에 따른 불평등 해소와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한 정책에 필요한 재원조달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가 예산안과 국가재정운용계획안을 제출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가 바로 ‘지출 구조조정’ 및 비과세 감면을 포함한 ‘조세지출 재정비’지만 이를 통해 과연 어느 정도 필요 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지출 쪽에서는 재정지출의 제로베이스 검토, 유사·중복 사업의 통폐합, 성과평가 기반 지출조정 등이 제시된다. 그런데 해마다 지출 구조조정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예산 편성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유사·중복 사업은 이름과 형식을 조금 달리해 해마다 예산사업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재정관료들은 누구든지 잘 안다. 또한 한국은 참여정부에서 도입한 성과평가제도를 ‘성과평가 공화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공공부문 모든 영역에 적용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 결과는 매년 형식적인 평가에 그친다거나 작정해서 평가를 할 경우에도 온갖 정치적 과정 탓에 평가 결과가 온전히 예산에 반영되지 못했다. 따라서 일시적이거나 한정적인 지출 구조조정은 있을 수 있지만 매년 큰 폭의 지출구조조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세지출은 어떠한가? 2024 조세지출예산규모는 77조원인데 예산기준별로는 사회복지분야가, 세목으로는 소득세가, 수혜자별 귀착은 중소득자나 중소기업(자영업 포함) 등이 가장 비중이 크다. 즉, 조세지출을 대폭으로 줄인다고 할 경우 중저소득 계층 및 소상공인에게 불리한 역진적인 소득재분배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사회복지분야에 대한 부의 소득 이전 규모가 축소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조세지출 축소 등은 듣기는 좋은 말이지만 실제 실천하기는 매우 어려운 주제다.

장기적으로는 복지재정 소요에 대해서는 목적세 신설이 되었든 기존의 조세체계를 통해서든 증세를 통한 세입 확충을 주요한 수단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이런 원칙과 당위론이 설 자리를 잃게 한다. 2022년, 2023년, 2024년 세 번의 대규모 감세정책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약화된 세입기반이 더욱더 좁아지게 됐다.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이라는 조세기반 강화의 대략적인 원칙도 허물어지고 기껏 힘들게 만들어 놓았던 새로운 세목(금융투자소득세)조차도 폐지 혹은 유예의 길로 가고 있는 현실은 게도 구럭도 다 잃게 되는 상황이라 매우 아쉽다.

류덕현 중앙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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