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2일!] "국민 여러분 오늘부터"… 충격적인 대통령 특별담화

김유림 기자 2024. 8. 12.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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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금융실명제 실시

1993년 8월12일. 금융실명제가 예고도 없이 전격 실시됐다. 이날 저녁 7시24분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하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한다고 발표하면서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 이 시간 이후부터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진다."

그동안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부작용 우려 등 논란이 계속되면서 2차례 좌절을 겪었던 금융실명제가 전광석화처럼 시행된 순간이었다.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 사건이 촉매제 역할


지난 1982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을 계기로 금융실명제 논의가 시작됐다. 사진은 지난 2016년 방영된 JTBC '썰전' 방송화면. /사진='썰전' 방송캡처
금융실명제는 김 대통령의 취임 첫해에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전격 시행됐다. 금융실명제 도입에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이다.

1982년 발생한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은 나라를 뒤흔들었다. 당시 장영자는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렸다. 장영자는 국회의원과 안기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를 내세워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장영자는 자금난을 겪는 건설업체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하고 대여액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 유통시키고 뒷돈을 챙겼다.

이 어음을 시중에서 할인한 뒤 다시 굴리는 수법으로 6400억원의 어음을 유통시켰고 1400억원을 사기로 착복했다. 장영자는 "경제는 유통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항변했지만 어음이 한 바퀴 돌았을 때 어음을 발행한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사건으로 사채 등 지하경제의 위험성이 부각되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금융실명제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2차 시도 모두 실패… 기득권층 저항에 좌초


금융실명제 도입은 김영삼 정부의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사진은 지난 2011년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 기록전시관 앞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기록전시관 개관 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생전의 김 전 대통령. /사진=뉴시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2년 7월 금융실명제 추진 방안이 처음으로 공식 발표됐다. 강경식 재무장관과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 대통령 결재를 받아 금융실명제 도입에 나섰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벽에 부딪혀 실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부칙으로 시행 시기를 무기한 연기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전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도 1988년 취임 후 1989년 4월 금융실명제 실시단(단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구성해 1990년 4월까지 1년 동안 실명제 준비작업을 벌였으나 역시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준비단을 해체했다.

그렇게 금융실명제법은 사실상 좌초됐다. 표류하던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추진에 급물살을 탔다.


마침내 시행된 '금융실명제'


정부는 지난 1982년부터 법률 제정 등을 통해 금융실명제 도입을 시도했으나 당시 정치·경제적 논란으로 시행 시기가 계속 유보됐고 10년이 지난 1993년 비로소 긴급명령을 통해 금융거래의 실명화를 이뤄냈다. /자료사진=이미지투데이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8월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전격 발동했다.

금융기관에서 거래할 때 가명 혹은 무기명에 의한 거래를 금지하고 실명임을 확인한 후에만 금융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금융실명제'는 범죄의 온상이 되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구체적으로 ▲비실명으로 거래한 기존의 금융자산 소유자는 2개월 이내 실명으로 전환 ▲가명에서 실명으로 전환할 경우 연령에 따라 최고 5000만원까지 자금 출처 조사 면제 ▲2개월 경과 기간 지난 후 실명으로 전환할 경우 기간에 따라 시행일로부터 매 1년 동안 10%씩, 최고 60%까지 과징금 부과 등의 내용이 명령권에 담겼다.


대규모 자금 이탈은 기우였다


금융실명제는 일상생활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자료사진=이미지투데이
금융실명제가 갑자기 시행됐지만 당초 우려했던 부작용은 크지 않았다. 실명전환 의무 기간이었던 8월13일부터 10월12일까지 실명전환율은 무려 97.4%에 달했다. 가명·차명예금 6조2379억원이 실명으로 바뀌었다. 대규모 자금 이탈과 함께 지하경제가 오히려 더 활성화될 것이라는 걱정도 기우였다.

금융실명제는 단순히 금융·세제 등 경제부문뿐 아니라 우리 정치·사회 전반에서도 파급효과가 지대했다. 금융자산에 실명이라는 꼬리표가 붙음에 따라 공명선거를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가 실효성을 가졌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차단하는 데도 기여했다.

기업도 이전과는 달리 불법적인 비자금 조성이 용이하지 않게 됐다. 사회 각 분야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고 책임을 지는 실명문화가 확산됐다. '실명제'라는 용어가 유행어가 되는 등 금융실명제는 직·간접적으로 일상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문민정부의 경제개혁은 부동산실명제로 확대됐다.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부동산에 자금이 쏠리고 명의신탁에 의한 투기와 음성 불로소득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정부는 1995년 1월6일 부동산실명제 도입을 발표했다.

하지만 임기 말 경제난 심화로 금융실명제 완화론이 제기되자 1997년 말 장기채권과 외평채를 무기명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는 보완 조치를 단행한 것은 실명제 도입 취지를 퇴색시키고 비자금 조성의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옥에 티로 지적된다.

김유림 기자 cocory0989@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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