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 “金 영광은 이미 과거... 3관왕도 바닥부터 경쟁시키는 게 한국 양궁”
‘마지막 한 발’에서도 극도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강심장은 오랜 수련의 결과였다. 런던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뒤 3년의 슬럼프를 겪으며 마음 비우기를 터득했고, 리우올림픽 32강에서 탈락해 오열한 뒤에는 뒤돌아보지 않는 냉정을 연마했다. 도쿄올림픽 8강에서 또다시 실패한 뒤엔 어록을 남겼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쏜 화살이고, 돌아오지 않는다.”
올림픽 최다 금메달리스트로 한국 양궁의 새로운 전설을 쓰고 있는 김우진을 지난 9일 서울에서 만났다. 파리 앵발리드 광장의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 돌아온 그는, 브레이디 엘리슨과의 ‘마지막 한 발’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묘사했다. “어차피 더 이상 쏠 화살이 없었다. 마지막 한 발이라면 후회 없이 쏘자, 하고 활을 들었다.”
◇ 엘리슨과 4.9mm차 승부, 나를 믿고 쐈다
-’오빠 믿고 쏴’ ‘해 뜨면 마른다’ 등 김우진 어록이 화제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한 말인데 이슈가 됐나 보다(웃음).”
-책을 많이 읽나?
“그렇진 않다. 양궁이란 종목이 정적이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운동이다 보니 그런 말들이 나온 것 같다.”
-힙합을 좋아한다던데 혹시 랩에서?
“뭐, 그럴지도(웃음).”
-브레이디 엘리슨과의 결승전은 세기의 명승부였다.
“세트 스코어가 동점인 상황에서 내가 텐텐텐(10·10·10)을 쐈기 때문에 상대가 압박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엘리슨 역시 텐텐텐을 쏘더라. 그가 왜 세계적인 선수인지 절감했다.”
-계속 끌려가던 경기라 멘털이 흔들리고도 남았을 텐데.
“4강전에서 이우석 선수를 이기고 올라간 결승이었다. 내가 금메달을 따야 이우석 선수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아 포기할 수 없었다.”
-슛오프에 갔을 땐 천하의 ‘수면 쿵야’라도 떨렸을 것 같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런데 뒤에서 (박성수) 감독님이 ‘너 김우진 아니냐, 김우진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냐’ 하시더라. 나를 믿고 후회없이 쐈다.”
-4.9㎜ 차이로 이긴 것이 미안하진 않았나.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미안하다고 져줄 순 없지 않나. 엘리슨도 말했다. ‘오늘 우리는 챔피언처럼 행동했고, 챔피언처럼 쐈다’고.”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엘리슨과 슛오프를 겨뤘더라.
“그땐 엘리슨이 먼저 쐈다. 엘리슨이 텐(10)도 아니고, 엑스텐(X10) 라인에 물리도록 쏜 뒤 포효하더라. 이겼다고. 근데 내가 쏜 화살이 엑스텐을 적중했다(웃음).”
-엘리슨은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4년 뒤 LA올림픽에선 김우진이 금메달을 양보해줬으면 하던데.
“스포츠맨십으로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하!”
◇ 김우진 이기려면 김우진을 쏴라?
-개인전과는 인연이 없다가 올해 한을 풀었다.
“올림픽 첫 무대인 리우에서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32강에서 탈락했다. 그때도 심박수 측정기가 있었다면 150(BPM)도 넘었을 것이다.”
-도쿄올림픽 16강에선 9개 화살을 모두 10점에 꽂아넣는 바람에 ‘김우진을 이기려면 김우진을 쏘거나, 11점을 쏴야 한다’는 우스갯말이 나왔다.
“좋은 선수로 인정받아 기뻤지만, 만점에 취했는지 8강에서 욕심을 내다가 그만 지고 말았다.”
-이번엔 마인드컨트롤을 했나?
“일단 단체전 우승이 목표였고 개인전엔 마음을 비웠다. 협회장님(정의선)이 즐기면서 하라고 했던 말씀도 떠올랐다. 머리는 가볍게, 가슴은 뜨겁게.”
-단체전에선 맏형 역할을 듬직하게 해내더라.
“후배들이 오히려 나를 도와줬다. 내가 쏠 때 ‘크게 봐라, 10점 필요 없다’ 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더라.”
-’크게 보라’는 게 무슨 뜻인가?
“10점만 쏘려고 애쓰면 자세가 위축된다. 과녁을 크게 보고 여유 있게 쏴야 오히려 적중한다.”
-김제덕 선수가 괴력을 다해 외치던 ‘파이팅!’이 몰입을 방해하진 않았는지.
“전혀! 오히려 지난 올림픽보다 목소리가 작아져 아쉬웠다(웃음).”
-김제덕은 손등에 벌이 앉았는데도 10점을 쏘더라.
“벌에 쏘이는 것보다 활을 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양궁은 무조건 금메달이라는 국민 기대도 부담이었을 텐데.
“그만큼 한국 양궁을 믿고 사랑하시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여성 단체 양궁은 10연패의 대기록을 세웠는데 남성은 이제 3연패다.
“한국 여성들이 독해서, 하하! 농담이고, 남자 선수들은 어느 나라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실력이 평준화됐다. 더 노력해야 한다.”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어떤 기분이었나?
“앵발리드는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인데, 거기 제일 높은 곳에 태극기가 올라가니 뭉클했다.”
-MZ세대는 애국이란 말 싫어하지 않나.
“대한민국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까? 나라가 없다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가 될 수 있을까?”
◇ 정의선 협회장, 선수 음식 직접 다 먹어봐
-올림픽때 마다 한국양궁협회의 공정성이 칭송받는다.
“시골에 묻혀 있던 활 잘 쏘는 선수가 어느 날 국가대표의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게 양궁 국대 선발 시스템이라는 말이 있다.”
-메달리스트라고 특혜를 주지 않는다던데.
“예전엔 20강부터 참여하게 해줬는데 이젠 120명과 똑같이 64강부터 도전해야 한다. 올림픽 3관왕도 예외 없다. 나 역시 9월에 시작되는 2025 광주세계선수권대회 국대 선발전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3차에 걸친 평가전이 고통스러워 포기하는 선수도 있다더라.
“그래서 후배들에게 충고한다. 너의 전부를 쏟아붓고도 떨어지면 다음에 다시 들어올 수 있지만 도중에 스스로 포기하면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고.”
-현대자동차의 전폭적인 지원은 올해도 화제였다.
“평준화돼가는 세계 양궁 추세에서 한국 양궁이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과학적 훈련 시스템을 강화해주고 있다. 최고의 화살을 골라내는 슈팅머신에 이어 슈팅로봇을 개발해 선수들을 경쟁시킨다. 활을 잡는 그립도 선수 각자의 손 모양에 맞게 제작해주고 직사광선을 막는 냉각 모자도 개발했다. 진천선수촌엔 파리 앵발리드 경기장을 똑같이 구현한 세트장이 설치됐다. 영어와 프랑스어로 진행하는 장내 방송까지 라이브로 똑같이 진행됐다.”
-특히 ‘키다리 아저씨’라 불릴 만큼 정의선 회장의 양궁 사랑이 지극하다 들었다.
“모든 경기를 관람하면서 선수들 편의를 직접 챙기신다. 이번에도 파리의 훈련 캠프와 숙소, 휴게공간을 일일이 다니며 점검하셨다. 점심시간에도 선수들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경기장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따로 휴게공간을 마련해주시고 우리가 먹을 음식도 직접 다 먹어보셨다고 하더라. 코로나 때 무관중으로 치러진 도쿄올림픽에도 오셔서 살인적인 더위에도 모든 경기를 관람하시는 걸 보고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다.”
-다른 협회들도 양궁협회를 본받으라는 여론이 높다.
“양궁협회의 선한 영향력이 널리 퍼져나가지 않을까.”
-안세영 선수와 배드민턴 협회와의 갈등은 어떻게 보나.
“제가 딱히 드릴 말씀은 없지만, 유능한 선수이니 협회와의 소통으로 원만히 해결되길 바란다.”
◇ 내가 과묵? 말 많다고 아내에게 혼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활을 처음 잡았다.
“형이 먼저 시작해 따라다니다가 감독님이 ‘너도 해볼래?’ 해서 시작하게 됐다. 시골에 살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지자체의 지원을 받으며 훈련했다.”
-어릴 때부터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따며 두각을 나타냈더라. 양궁에 맞는 기질이 따로 있을까?
“좀 더 끈기있는 사람이 유리하지 않을까. 양궁이 어느 날 벼락처럼 잘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니까.”
-선수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런던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뒤 많이 방황했다. 전국체육대회에서 60명 중 55등까지 밀려나면서는 양궁을 그만둬야 할까도 생각했다.”
-어떻게 이겨냈나?
“내가 속한 청주시청 홍승진 감독님이 묵묵히 격려해주셨다. 1등 하던 선수가 꼴찌를 했는데도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시더라. 같은 팀 배재현 선수도 큰 힘이 됐다. 활 쏘기 싫으면 다른 거라도 하라면서 날 데리고 계속 운동장으로 나갔다. ‘너의 재능이 아까웠다’고 하더라.”
-징크스도 있나.
“숫자 4는 아예 안 쓴다. 화살 12발에 번호를 매기는데 4번을 빼고 13번까지 쓴다. 국에 밥도 안 말아 먹고, 빵도 안 먹는다. 실업팀에 들어와 실내 대회를 뛰던 어느날 간식으로 빵이 나와 신나게 먹자 선배 한 명이 ‘야, 빵 먹으면 빵점 쏜다’고 하더라. 그런데 진짜 0점을 쏘고 말았다. 하하!”
-운동선수치고는 살집이 있는 편이다.
“양궁은 몸의 작은 근육을 이용해 미세하게 쏘는 종목이라 자신의 적정 몸무게를 찾는 게 중요하다. 살을 빼고 싶긴 한데, 이번에 3관왕 한 걸 보면 지금이 적정 체중 같기도 하고(웃음).”
-충청도 스타일인가?
“뒤끝은 좀 있다(웃음).”
-세상 과묵해 보이는데 MBTI는 ESTP더라.
“사람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말이 너무 많다고 아내가 주의를 준다(웃음).”
-두 돌 된 아들이 공항에 마중 나왔다.
“오늘 아침에 날 깨우더니 공룡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조르더라. 가족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양궁을 인생에 비유한다면?
“삶 그 자체 아닐까. 점수에 연연하면 더 큰 실수를 하는 것, 8점을 쐈지만 10점을 쏴서 만회할 수 있는 것. 양궁과 인생 모두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위기 상황에도 잠자듯 평정심을 유지한다고 해서 별명이 ‘수면 쿵야’다. 그 비결이 궁금하다.
“떨리고 긴장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두려움을 숨기려 하는 대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쉰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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