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원치 않아요” 그 말 뒤엔…‘보복 두려워요’ 소리없는 외침

최윤아 기자 2024. 8. 1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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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스토킹 살인 사건 2심 선고일이었던 지난달 17일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피해자 유가족과 여성의당이 교제폭력 처벌과 보호조치 강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은 피해자 이은총씨의 1주기였다. 연합뉴스
“은총이는 생의 의지가 정말 강했어요.출산 100여일 만에 전국을 돌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더 나은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아이였어요.”

장대비가 쏟아지던 7월17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인근 식당에서 이은총씨의 사촌 언니 은아(가명)씨가 말했다. 이날은 이은총씨의 기일이자, 그의 목숨을 앗아간 옛 연인 설아무개씨의 2심 선고일이었다. 죽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은아씨가 반(半)수사관처럼 증거를 모으고 다닌 지 1년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은총이는, 친동생 같은 아이였어요. 동생 죽고 단 하루도 이 사건에 매달리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고인은 이혼 뒤 여섯살 딸을 키우며 가족 생계와 아버지 병원비까지 책임지던 가장이었다. 한 회사의 팀장으로 유능함을 인정받은 사회인이기도 했다. 고단했지만 긍지로 단단했던 여자의 삶은 ‘한때 가장 가까웠던 남자’로 인해 급격히 위태로워졌다. 그리고 이 남자가 결국 여자를 살해한 범죄는 ‘인천 스토킹 살인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국가가 무엇을 놓쳤기에 은총씨의 생을 지키지 못한 걸까.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교제폭력 112 신고 건수는 7만7150건, 교제폭력과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은 총 56건이다. 하루 평균 211건의 피해 신고가 접수되고, 6.5일에 한명꼴로 사망하는 셈이다. ‘또 다른 은총씨’를 만들지 않기 위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을 찾기 위해, 한겨레는 은총씨 사건의 1심 판결문과 수사 기록, 유가족 인터뷰를 토대로 교제 당시부터 살인에 이르기까지 상황을 되짚었다.

출동 현장에서 종결 처리된 교제폭력

은총씨가 가해자 설씨와 교제를 시작한 건 2022년 6월. 그해 말 설씨는 은총씨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연애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지만 2023년 2월 설씨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커플 사진을 올렸다. 은총씨가 휴대전화를 빼앗아 사진을 지우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발생했다.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하고 있다. 헤어지자고 했더니 매달린다.” 1심 판결문에 담긴 2월19일 은총씨의 112 신고 내용이다.

은총씨는 이 사건으로 인해 갈비뼈가 골절돼 한달쯤 출근하지 못했지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그의 부상 정도를 파악하진 않았다. 둘 중 누가 주된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도 구분하지 않았다. 경찰은 ‘양측 피해가 경미하고 상호 간 처벌을 원치 않아 귀가조치했다’고 기록했다.

지난해 5월 이별 통보 과정에서 가해자에게 폭행당한 은총씨 팔에 든 멍. 유가족 제공

교제폭력은 형법상 폭행죄로 규율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 않는 ‘반의사불벌죄’다. 교제폭력 피해자는 자신의 일상을 너무나 잘 아는 가해자의 보복을 우려해 쉽사리 처벌 의사를 밝히기 어렵다. 게다가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력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폭행을 행사했다면, 쌍방폭행으로 처리돼 외려 가해자와 합의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하는데, 법이 이런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청이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실에 제출한 ‘교제폭력 신고 시 현장 대응 지침’엔 “피해자가 처벌불원 또는 사건 접수를 원치 않더라도 범죄 위험도가 높은 경우 적극 입건하라”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현장에서 이런 적극성이 발휘되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해 교제폭력으로 접수된 112 신고 사건 7만7150건 가운데 절반 이상(54.4%)이 현장 종결된 배경에는, 교제폭력의 이런 특수성이 있다.

은아씨는 “당시 사건으로 경찰에 피해를 신고해도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걸 학습하게 된 꼴”이라고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가해자 설씨는 석달 뒤인 2023년 5월 또다시 폭력을 휘둘렀다. 은총씨가 이별을 고하자 팔뚝이 시꺼멓게 멍들 정도로 때린 것이다. 은총씨는 그때 112 신고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폭행 1범’ 문구가 놓친 위험

은총씨가 숨진 뒤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가해자는 이전에도 교제하던 여성을 폭행한 전력이 있었다. 2018년 교제하던 여성을 폭행해 이듬해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은 것이다. 하지만 경찰 112 신고 사건 처리 기록(2023년 6월9일)에 가해자의 범죄 이력은 ‘폭행 1범’이라고만 기재됐다.교제폭력은 “재범률이 높고 폭력 정도도 중한”(대검찰청) 특수성이 있는데, 단순히 폭행으로만 기록되니 수사기관이나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험 정도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보복에 대한 극심한 공포

두차례 폭행 피해 뒤인6월1일 은총씨는 설씨에게 다시 한번 이별을 통보했다. 이튿날 아침 설씨는 은총씨의 출근길을 몰래 쫓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은총씨는 이를 회사에 알리고, 경찰서에 찾아가 설씨를 스토킹과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당시만 해도 스토킹 역시 반의사불벌죄(한달 뒤인 7월11일 폐지)였다.

이날설씨는 은총씨 딸이 다니는 유치원에 연락해 모녀의 소재를 파악하기도 했다. 직장 동료에겐 ‘은총이가 세상에 없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고, 대형마트에 들러 식칼을 샀다.

은총씨는 사흘 만에 고소를 취하했다. 설씨에게 피소됐다는 통지가 닿기 전이었다. “보복이 너무 무서워”서였다. “혹시라도 가해자가 접근금지를 신청했단 걸 알면 해코지할 것 같아요.” 6월9일 작성된 피해자 진술조서에는 은총씨의 극심한 공포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고소를 취하한 이후 또다시 112 신고를 해야 할 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거주하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설씨의 차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설씨를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긴급체포하고, 피해자로부터 100m 이내 접근 및 통신(연락)을 금지하는 ‘긴급 응급조치’를 했다. 이런 조치가 8월9일까지 이어지도록 잠정조치 2·3호(접근·통신 금지)를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무용지물 된 접근금지 명령

접근금지 명령은 무용지물이었다. 한달여 뒤인 7월17일, 새벽 5시50분. 설씨는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선 은총씨를 아파트 복도에서 흉기로 살해했다. “살려달라”는 딸의 비명을 듣고 아파트 복도로 뛰어나온 은총씨 어머니는 범행을 막으려다가 설씨가 휘두른 흉기에 손가락과 손목 등을 다쳤고, 할머니를 뒤따라 나온 어린 딸은 피범벅이 된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은총씨의 “성실했던 생이 허망하고 비참하게”(2심 판결문) 끝났다.

고 이은총씨 납골당. 유가족 제공

설씨가 범행 나흘 전부터 이날까지 하루 한차례씩접근금지 명령을 어기고 피해자 주변을 맴돌았다는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스토킹 가해자들이 잠정조치를 무시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윤정숙 박사가 지난해 스토킹처벌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112명에 대한 수사·재판 기록을 조사한 결과, 피해자 보호조치(응급·긴급응급조치, 잠정조치) 대상 82명 중 54명(65.0%)이 이를 어겼다. “접근금지 명령을 어기는지 점검도 안 하는데 무슨 실효성이 있겠습니까.” 은아씨가 답답하다는 듯 얘기했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가해자를 구속하거나 잠정조치 4호를 통해 한달가량 유치장에 가뒀다면 살인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은아씨는 회의적이다. “잡아두기만 해선 추가 범죄를 막을 수 없어요. 피해자에 대한 복수심만 불타오르게 하겠죠. 가해자가 그릇된 인식, 통제 안 되는 분노를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도록 심리적 치료와 상담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은총씨가 세상을 떠나고 꼭 1년이 되던 7월17일, 서울고법 제6-3형사부(재판장 이예슬)는 보복살인·스토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설씨에게 징역 30년에 전자장치 부착 10년을 선고했다. 징역 25년을 선고한 1심보다 5년 더 늘어난 형량이었다. 판사가 선고 요지를 낭독하는 내내 은아씨 어깨가 들썩거렸다.

항소심 선고 뒤 서울고법 앞에선 여성의당 주최로 교제폭력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은아씨가 말했다. “교제폭력 처벌법이 처음 발의된 게 2016년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수많은 여성이 죽었을 겁니다. 이건 국가의 책임 방기입니다.” 그의 울먹임이 거리에 흩어졌다. 가해자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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