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슐랭]④ 에밀레종 계승한 대종 서울 한복판에, 전 세계 종 650점 모인 고촌 이종근 기념관

허지윤 기자 2024. 8. 1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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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 2.3t 대종, 인류 건강 염원 담아
과학 담은 길고 장중한 한국 종소리
초등학생 약사 체험 교육 프로그램도
8월 8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국내 제약기업 종근당 본사 1층 로비 ‘고촌 이종근 기념관’에 있는 '종근당 대종.' /허지윤 기자

<미슐랭(미쉐린) 가이드는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레스토랑 평가·안내서입니다. 조선비즈는 미슐랭 가이드처럼 국내 기업과 기관이 운영하는 과학관과 박물관의 콘텐츠 ‘맛’을 평가하는 과슐랭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과학관, 박물관에 담긴 과학 정보와 함께 기업 직원들이 추천하는 근처의 맛집도 소개합니다. 과학과 문화를 배우며 맛집도 찾는 여행 가이드로 활용하길 바랍니다.>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종근당 본사에서 1층 로비 ‘고촌(高村) 이종근 기념관’에 들어서자 커다란 종(鐘)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종근당 대종’이다. 높이 1m, 무게 2.3t 규모로, ‘인류의 건강을 기원하는 종근당의 염원을 세상에 전하자’는 의미를 담아 우리나라 최고의 범종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본떠 제작했다.

종근당은 올해로 창립 83주년을 맞은 제약기업이다. 고촌 이종근 기념관은 회사 창업주인 고(故) 이종근 회장 별세 20주기를 맞아 2013년 개관했다. 서울시에 등록된 박물관으로, 초등학생들의 체험 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윤경 종근당고촌재단 학예사는 “지난 1993년 대전 세계박람회(EXPO) 개최 당시 종근당이 기증한 ‘엑스포 대종’을 10분의 1로 축소한 버전”이라고 소개했다.

초등학생들이 제약기업 연구원 체험 프로그램을 하며 종근당 고촌 이종근 기념관 전시실을 관람 중이다. /종근당고촌재단

◇전 세계서 수집한 종 650점 모여

고촌 이종근 기념관에는 이종근 회장의 집무실을 재현한 공간과 이 회장과 종근당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전시물, 650점에 달하는 종들이 함께 전시돼 있다. 생전 이 회장은 자신의 이름에 들어간 ‘쇠북 종(鐘)’자를 따 종 모양을 회사 심볼 마크로 썼고, 종의 큰 울림을 TV 광고에 담아 대중에게 종근당 기업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기념관에 전시된 종들은 이 회장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미국 등 세계 각지로 출장을 다니며 틈틈이 골동품상과 벼룩시장을 돌며 수집한 것과 해외 파트너 기업들과 사업을 하며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고촌 이종근 기념관 맨 앞에는 종근당 대종이 있고, 바로 뒤에 종근당 창업자인 이종근 회장의 사진과 함께 박두진 시인이 쓴 시 ‘우리의 기원’의 구절이 적혀있다.‘뛰노는 맥박에서 영원한 생명의 신비를 알게 하시고, 따뜻한 심장의 고동에서 한 생명의 존귀를 깨닫게 하소서(중략).’ 이윤경 학예사는 “이종근 회장과 모친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셨다”며 “종은 역사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컸다”고 말했다.

종근당은 우리나라에서 열린 국제 행사마다 종을 만들어 기증했다. 소화효소제 제스탄은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올림픽 공식 소화제로 지정됐다. 후원사 종근당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념한 종을 만들었다. 이종근 회장은 생애 마지막에 높이 3.9m, 지름 2.3m, 무게 23.6t에 달하는 엑스포 대종을 제작해 기증했다. 이 종은 이종근 회장 사후인 1993년 8월에 열린 대전세계박람회장의 종근당 각에 걸렸다. 대전시청은 엑스포 이후 매년 한밭종각에서 이 종으로 새해를 알리는 타종 행사를 하고 있다.

고촌 이종근 전시관에 종근당 창업자 고(故) 이종근 회장이 모은 종 650점이 전시돼 있다. /종근당

◇한국 동종 아름다움, 국제 행사에 선보여

엑스포 대종과 종근당 대종은 한국 동종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리가 청아하고 은은하다. 엑스포 대종 제조 당시 소리와 아름다움을 되살리기 위해 5분의 1로 축소한 모형 종을 제작한 뒤 컴퓨터로 음향, 두께, 형상 등을 조정하는 방식의 최신 주조 기법으로 만들었다.

범종의 구조는 크게 종의 윗부분인 종정부와 종의 몸체 종신부로 구분한다. 종정부는 종의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음관인 용통과 종을 종루에 달아 매는 장치인 용뉴 , 종의 뚜껑 부분인 종전(천판) 등으로 구성된다. 종신부는 상대, 유곽, 하대라고도 불리는 불리는 문양대와 종신으로 이뤄진다.

종근당이 대전시에 기증한 엑스포 대종의 상·하대, 유곽의 문양은 통일신라시대의 상화문과 엑스포엠블렘을 사용했다. 종을 치는 당좌는 백제논기의 연화문을, 그 옆 비천상 문양은 고구려벽화 진파리 4호분 비오문을 사용해 역사적 문양을 서로 조화시켜 엑스포를 기념할 수 있도록 도안됐다.

동양종과 서양종의 소리와 울림은 차이가 있다. 한국종을 비롯한 동양종은 밖에서 나무로 두드려 장중하고 여운이 긴 소리를 낸다면, 서양종은 안쪽에 있는 클래퍼라는 작은 방울이 달려 있어 울림이 짧고 경쾌하다. 종근당 대종과 엑스포 대종이 모델로 삼은 성덕대왕신종은 유난히 길고 맑은 소리가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성덕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경덕왕 때 만들기 시작해 혜공왕(재위 765~780년) 때 완성됐다. 전체적으로 당좌 2개, 명문 2개, 비천상 4개 등 범종의 주요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높이는 3.66m, 폭 2.27m, 무게 18.9t이다.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한밭종각. /한국관광공사

◇‘길고 장중한 울림’ 맥놀이의 과학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는 왜 남다를까. 과학자들은 성덕대왕신종은 타종 시 약 64㎐(헤르츠) 168㎐ 주차수의 음파가 서로 간섭을 일으켜 진폭이 다른 소리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를 ‘맥놀이 현상’이라고 한다. 맥놀이란 유리잔이나 종 같이 속 빈 둥근 몸체를 두드릴 때 나타나는데, 소리가 맥박처럼 약해졌다가 세지기를 거듭하며 우는 소리 현상이다.

학계는 맥놀이 현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성덕대왕신종 두께의 미세한 차이에 있다고 분석했다. 겉보기에 범종은 대칭형이지만, 표면의 문양·조각이 비대칭을 이루고 곳곳의 밀도나 두께도 미세하게 다르다. 이로 인해 범종에 여러 떨림들을 만들고, 그것들이 음파를 내면서 어우러져 우리 귀에 은은한 종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조영훈·송형록 국립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와 이승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쓴 ‘성덕대왕신종의 3차원 디지털 기록화 의미와 모니터링 기초자료 구축’ 논문에 따르면, 성덕대왕신종은 지금까지 2009년, 2017년, 2019년 총 세 차례에 걸쳐 레이저로 3차원 스캐닝했다.

이를 통해 성덕대왕신종의 두께는 종단면에서 93~189㎜, 횡단면에서 73~191㎜로 측정됐다. 이는 앞서 1999년 국립경주박물관의 사진측량 모델과 비교할 때 약 10㎜ 정도 얇은 수치인데, 이러한 차이는 측정 오류 또는 기록 기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종각에 걸려있는 성덕대왕 신종.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을 어떻게 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비늘까지 살아있는 용머리 모양 고리, 몸통에 새긴 연꽃무늬와 비천상 등 통일신라 금속공예술의 절정으로 꼽히는 이 종을 만드는 데 무려 34년이 걸렸다. 실패를 거듭하다가 갓난아기를 던져넣자 쇠가 붙었다는 설화가 유명하지만, 역사 기록에도 없고 현대의 성분 분석 결과 사람 뼈의 주성분인 인(燐)은 검출되지 않았다.

다양한 설이 있으나 학계는 성덕대왕신종을 비롯한 신라시대 종이 전통 종 제조 방법인 밀랍 주조 기술로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밀랍으로 문양을 만든 뒤 열을 가하고 녹여 주조하는 방식이다. 2005년 국립중앙과학관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선림원종을 밀랍 주조기술로 복원했다.

제작진은 내화(耐火)벽돌로 속 거푸집을 만든 뒤 종의 문양을 본뜬 밀랍을 붙였다. 여기에 다시 겉 거푸집을 붙인 뒤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 빈 공간을 만들었다. 이 공간에 청동 쇳물을 부어넣어 최종적으로 종의 형태를 만들었다. 신라 종은 문양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인데 오늘날 사용하는 모래 거푸집으로는 이를 복원할 수 없었다.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은 성덕대왕신종의 성분을 분석했다. 그 결과 구리와 주석의 평균 조성비가 86:13인 구리·주석계 청동으로, 불순물이 매우 적은 정제된 원료로 제작됐다고 확인했다. 다만 종을 주조하기 위한 원료 수급이나 주조 방법 등에 대한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초등학생들이 제약기업 연구원 체험 프로그램을 하며 종근당 고촌 이종근 기념관 전시실을 관람 중이다. /종근당고촌재단

◇‘약업 보국’ 기업가 정신 체험 프로그램도

고촌 이종근 기념관은 약업보국(藥業保國)을 실천한 기업가 정신을 알 수 있는 체험형 문화 교육 공간이기도 하다. 국내외 의약 역사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지루하지 않도록 전시실을 조성한 게 인상적이다.

이종근 회장은 1934년 화광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공소 견습을 시작으로 경성정미소 쌀 배달부로 일했다. 그러다 1939년 약품 외판원을 일하며 처음 제약업에 처음 발을 들였다. 1941년 종근당을 설립했고, 1960~1970년대 국내 최대 규모의 원료 합성·발효 공장을 설립해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의약품 원료 국산화를 이뤄냈다.

1968년 국내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 항생제를 미국·일본 등 해외에 수출하며 한국 제약산업의 현대화와 국제화에 기여했다. 1973년 장학사업을 위한 종근당고촌재단을 설립해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에 힘썼다. 종근당은 1980년 항결핵제 리팜피신을 개발해 결핵 퇴치에 앞장선 고인의 뜻을 기려 2006년 세계보건기구(WHO) 결핵 퇴치 국제협력사업단과 ‘고촌상(Kochon Prize)’을 제정했다.

전시 관람은 사전 예약해야 할 수 있다. 종근당은 이 전시관에서 ‘어린이 약사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초등학생 1~3학년 대상으로 하며,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이다. 최소 20인 이상 단체만 신청 가능하며 참가비는 무료다. 카카오톡 ‘고촌이종근기념관’ 채팅창으로 신청하면 된다. 중학생 대상 체험 프로그램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20인 이상 단체만 카카오톡 채팅을 통해 신청해야 한다.

기념관이 있는 종근당 본사 건물이 지하철 2호선·5호선 충정로역과 지하로 연결돼있어 접근성이 우수하다. 시청역에서 1개 역만 이동하면 되고, 광화문역에서도 2개 역 거리다. 주변에 한국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충정로역 뒤로에는 작은 식당들이 많다. 종근당 직원은 주변 맛집으로 ‘충정각’을 추천했다. 충정각은 120년 이상 된 서양식 주택을 개조해 만든 이탈리안 식당으로, 건물 앞에는 100년은 족히 넘은 은행나무가 있고, 동양에서는 볼 수 없는 9각의 첨탑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전시실 내 종근당 고촌 이종근 회장 집무실을 재현한 공간. /종근당

과슐랭 별점

자체 콘텐츠(3/3) ★★★ 고촌 이종근 회장의 기업가로서의 인생 여정과 의학·제약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체험형 전시물이 인상적.

주변 연계(2/2) ★★ 지하철 2호선·5호선 충정로역과 지하로 연결돼 있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접근성이 우수한 편.

전체 평가(3/5) ★★★ 전시 공간이 작고, 종(鐘)에 특화된 예술 박물관은 아니니 유의해야.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구성된 체험형 전시 공간과 도슨트의 풍부한 설명이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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