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 김영삼' 기습 발표에 전 국민 얼떨떨…금융실명제의 탄생[뉴스속오늘]

박상혁 기자 2024. 8.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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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1993년 8월12일 오후 7시 45분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하고 있다./사진=대한뉴스 캡쳐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의 긴급 담화를 듣고 국민들은 얼떨떨했다. 실명인증은 어떻게 하는 건지, 익명·차명으로 개설한 통장은 안전한지 안 가본 길이어서 불안이 컸다.

시장은 곧바로 얼어붙었다. 금융실명제 실시 직후 종합주가지수(KOSPI)는 10% 가까이 폭락했고, 금값과 사채시장 금리는 치솟았다. 여기저기서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내 곧 안정을 되찾았다. 주가는 1주일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고 실명 전환율은 약 2개월 뒤 97.4%를 기록했다.

초반엔 혼란이 있었지만, 금융실명제는 투명한 금융 거래를 가능하게 해 경제 전반에 신뢰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실명 거래의 대가…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로 돌아왔다
1982년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인 '장영자,이철희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사진=KBS 캡쳐

금융실명제 도입 논의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1960년대부터 가명이나 타인 명의로 계좌를 만들고도 금융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는 비실명예금을 허용하는 대신 경제 성장에 쓰일 투자 자금(예금)을 은행에 많이 예치할 것을 기대하며 이를 용인했다. 물론 탈세와 음성적인 자금 거래 발생 가능성을 알고 있었지만, 경제 성장을 이유로 모른 척했다.

대가는 컸다.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 사건'으로 알려진 1982년 7월 '장영자·이철희 부부 7000억 어음 사기 사건'에서 부실한 금융 시스템의 민낯이 드러났다.

이들 부부는 자금 압박을 받는 기업들에 접근한 해 돈을 빌려주는 대신 그 돈의 몇 배에 이르는 약속어음(지정된 날짜에 돈을 갚겠다는 증서)을 발행받고 이를 할인해 현금을 마련했다. 이 돈을 또다시 기업에 빌려주고 막대한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이들 부부에게 어음을 내준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금융시장이 마비됐다. 당시엔 어음의 매수자와 매도자를 실명으로 적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수사당국이 자금 출처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 받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7월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는 '7.3조치'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금융실명제를 '1986년 이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날 시행하겠다'며 기존 방침을 바꿨다.

이후 정권을 물려받은 노태우 대통령도 1991년까지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시를 유보했다.
3수 끝에 시행된 금융실명제…극비리에 진행된 대형 프로젝트
금융실명제 도입 실시 후 이튿날인 1993년 8월13일 실명전환을 하러 은행에 방문한 시민들 모습./사진=대한뉴스 캡쳐

꺼져가는 금융실명제의 불씨는 김영삼 대통령이 되살렸다. 1993년 문민정부 시대를 연 그는 그해 6월 이경식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따로 불러 '금융실명제 추진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루아침에 금융 질서를 뒤바꾸는 대형 프로젝트. 실무진들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준비과정을 거쳤다.

이들은 처음엔 강남구 휘문고 앞의 한 건물 안에서, 이후엔 '작업 효율성'을 이유로 정부 과천청사와 가까운 아파트에서 합숙 작업을 했다. 가족과 동료 직원, 직장 상사들의 의심을 피하려고 '가짜 해외 출장'을 떠나기도 했다.

결국 2달 만에 금융실명제 최종안이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졌고, 이에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동했다.

이날 발표엔 △금융 거래 시 실명 사용 △2개월 내 실명전환 시 최대 5000만원 자금 출처조사 면제 △ 금융실명제 실시로 자금난 겪는 중소기업에 6200억원 지원 등 내용이 담겼다.

도입 초반 큰 혼란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빠르게 정착했다. 실명전환 의무 기간이었던 10월12일까지 실명 전환율은 97.4%에 달했고, 실명으로 전환된 가명과 차명 예금액은 6조2379억원에 달했다.
투명성·신뢰성 강화…하지만 '솜방망이' 지적도
당시 금융실명제 도입을 보도한 신문 1면 모습/사진=대한뉴스 캡쳐

이날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지하경제를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외에도 수사당국이 정경유착 등 각종 부정부패 사건에서 사용된 자금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외신들도 한국의 금융실명제 도입 결과를 보도하며 '경제 시장을 선진화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처벌 수위가 낮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비실명으로 거래해 부당이익을 취해도 원금이 아닌 이자 및 배당소득에만 90% 과세하는 금융실명법 제5조는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박상혁 기자 rafand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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