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위대한 선교사는 모국어 성경이다”

신상목 2024. 8. 12.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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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5~6)

안녕하세요. 더미션 독자 여러분, 또 한 주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다윗의 시편으로 문을 엽니다. 무더위가 도통 꺾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의 열기에서 피할 수가 없네요.’ 성경의 한 구절만 이렇게 따다가 우리 편한 대로(?) 쓰면 안 되지요.

원래 이 시는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피조 세계, 곧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면서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이어 여호와의 율법과 교훈은 완전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겐 반석이며 구원자가 되신다는 노래입니다. 복음성가 가사에도 나오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가 등장하는 시구입니다. 덥더라도 이 세계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평소 가슴을 쭉 펴고 걸으면서 시선을 하늘로 향해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에도 주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우선 ‘20세기의 선교사’ 타이틀의 반열에 오른 카메론 타운센드와 성경번역선교회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국가의 표준언어 외에도 이 세상에는 온갖 부족어가 있습니다. 타운센드는 이 부족들에게도 그들 언어로 된 성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선교회를 창립해 수많은 부족들에게 성경을 보급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여기에 확실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찬송가 작곡가 아이라 생키, 미국의 2차 대각성운동의 리더였던 찰스 피니 등을 만나보세요. 파리올림픽에서 16년 만에 여자 단체전 동메달을 안긴 선수들의 그 이면 이야기도 만나보시지요. 88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양영자 선수가 복음을 전해 탁구선수로 길러낸 이은혜 선수가 그 주인공이랍니다.

304년 8월 12일 시칠리아의 기독교 집사 유플리우스가 성경을 소유하고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큰 소리로 반복해서 선포했다는 이유로 순교합니다. 로마제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는 매우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이 순교를 기대했고 유플리우스와 같은 일부는 적극적으로 순교를 추구했습니다.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 창립
1942년 8월 12일 윌리엄 카메론 타운센드와 L. L. 레거스 목사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클리프성서번역회(Wycliffe Bible Translators)를 설립합니다. 윌리엄 케리와 허드슨 테일러가 19세기의 선교사였다면 타운센드는 20세기의 대표적 선교사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가 위클리프성서번역회를 창설해 미전도 종족을 대상으로 성경을 보급하게 된 계기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앞서 대학 2학년 때 학생자원운동에 가입했던 그는 존 R 모트가 학교에서 강연하는 것을 듣고 선교에 헌신, 3학년 때 LA바이블하우스가 라틴아메리카에서 활동할 성경판매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지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1917년 과테말라로 떠납니다. 그는 거기서 스페인어 성경을 보급하던 중 칵치퀼 원주민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스페인어 성경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추장이 타운센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네 하나님이 그렇게 똑똑하다면 왜 우리 부족 말은 안 배웁니까?” 그 말에 충격을 받은 타운센드는 산타카타리나에 정착해 칵치퀼 부족의 언어를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14년 동안 원주민들이 성경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을 칵치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기간에 타운센드는 성경을 읽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관심이 커졌고, 하나님은 그의 비전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1934년 미국 아칸소에 문을 연 ‘캠프 위클리프’였습니다. 영어 성경 전체를 최초로 번역한 전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의 이름을 딴 ‘캠프 위클리프’는 젊은이들에게 기본적인 언어학 및 번역 방법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캠프가 성장하면서 언어학 연구소(현재 SIL International로 알려짐)가 되었습니다.

인력 및 자금과 같은 자원을 다룰 또 다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타운센드는 1942년 위클리프성서번역회를 공식적으로 공동 설립했습니다. 이후 단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사랑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성경 번역을 통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접근성을 제공하기 위해 전 세계 교회와 지속적으로 협력해 왔습니다.

타운센드는 사역을 시작한 지 50년이 됐어도 은퇴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소련으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캅카스 지방에서는 약 100여개의 언어가 사용되는데 그 언어들로 번역된 성경이 없다는 것을 알게 돼 72세의 나이에 모스크바로 떠나 하루에 몇 시간씩 러시아어를 공부했습니다. 이후 러시아 기초 단체를 마친 뒤 캅카스로 가서 언어학자나 교육가들과 의논을 시작했습니다.

평생 그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해준 한 가지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세였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선교사는 모국어로 된 성경이다”라는 말을 즐겨 했습니다. 이어 “그 선교사는 휴가도 필요 없고 외국인 취급을 받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1982년 별세했습니다.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에 따르면 전 세계 7300개 언어 중 1067개 언어에 아직 자국 또는 종족어로 된 성경이 없는 상황입니다.

1667년 8월 13일 영국 학자이자 신학자이며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의 저자 제레미 테일러가 5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타일러 목사는 영국 국교회 사제로 유명한 작가였습니다. 그의 시적인 표현은 ‘목회자의 셰익스피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한 데 저서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1651)은 시적인 표현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D L 무디와 함께 부흥운동 이끌었던 찬송가 작곡가, 아이라 생키 별세
1908년 8월 13일 D L 무디의 전도 여행에서 음악 지도자로 잘 알려진 아이라 D 생키가 별세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복음성가 가수이며 작곡자로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의 부흥운동 핵심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지은 복음성가 곡들은 부흥집회 때 많이 불렸으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곳에 번역돼 널리 알려졌습니다. 한국 찬송가에는 ‘나 주의 도움 받고자’(214장)를 비롯해 8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생키는 1840년 펜실베이니아주 에딘버러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 출신 부친은 은행원이었고 전직 주 상원이었으며 감리교회의 평신도 설교자였습니다. 생키는 소년 시절부터 부모가 좋아하는 찬송을 잘 불렀고 저녁마다 찬송가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16살 때 킹스채플교회 부흥집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 뉴캐슬의 감리성공회교회 성도가 됐습니다.

생키는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군대에 자원 입대했고 군종실 군목과 함께 찬송을 인도했습니다. 전쟁 이후 국세청에 근무하면서 YMCA 사역을 도왔습니다. 1870년 30세가 되던 해에 생키는 YMCA 지부의 뉴캐슬 회장이 되어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 참여했는데, 이때 대회에서 성악가로 알려졌고 부흥사 무디 목사를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몇 달 후 생키는 처음으로 무디 목사의 전도집회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무디 목사는 생키가 찬송가 ‘샘물과 같은 보혈은’을 즉석에서 연주해 긴 기도로 인해 졸고 있던 청중을 다시 뜨겁게 감동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때 무디 목사는 생키에게 선교 사역에 동참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두 사람은 1899년 무디 목사가 사망할 때까지 29년간 함께 세계적인 부흥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때 생키는 시각장애인 작곡가 F 크로스비와 필립 블리스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받아 찬송을 불렀고, 생키 자신도 수많은 찬송가를 작곡했습니다.

생키는 평생 1200편가량의 복음 찬송을 작곡했습니다. 그는 녹내장으로 말년의 5년 동안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크로스비 등 찬송가 작가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생키는 1980년 가스펠 음악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549년 8월 15일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이끄는 스페인 예수회가 일본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자비에르는 궁극적으로 중국에 도달하기를 희망하면서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중국에 복음을 전하면 일본이 지혜를 얻기 위해 중국에 의지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개종이 훨씬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846년 8월 15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자신이 기독교를 조롱한다는 소문에 대해 자신의 종교에 관한 글을 발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떤 기독교 교회의 회원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진리를 부인한 적이 없으며 종교 일반이나 특히 기독교 교파에 대해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근대 부흥의 아버지, 찰스 피니 별세
1875년 8월 16일 19세기 최고 부흥사였던 미국의 전도자 찰스 그랜디슨 피니가 별세합니다. 근대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미국의 2차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고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웨일즈 부흥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오벌린대학의 설립자이자 학장으로 30여년간 신학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켰습니다. 기존 신자들에게는 첫사랑의 회복을, 불신자들에게는 회개에 대한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일주일에 5만명이 넘는 영혼들을 회심시키기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회심자들 가운데 85% 이상이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은 교회개혁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의 사회적 이슈였던 노예제도 철폐와 인종차별 등의 사회 개혁에도 큰 영향을 끼치며 진정한 부흥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찰스 피니는 1792년 미국 코네티컷주 워렌에서 농부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21년 치열한 자아와의 싸움 끝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극적인 회심을 체험한 후 변호사직을 포기하고 신학 공부를 한 뒤 목회자로 변신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아무것도 뒤섞거나 왜곡하지 않은 성경 그대로의 복음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회심했는데 그를 연구한 이들에 따르면 50만명 이상이 그를 통해 그리스도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의 말씀운동에서 시작된 제2의 대각성운동은 뉴욕과 필라델피아, 보스턴은 물론 미국과 영국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1832년 뉴욕에서 목회를 시작, 1835년 오벌린대학에 신학과를 설립했고 지역교회 목회자이자 신학교수로 섬기는 와중에도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복음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현대 기독교 부흥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그는 심장병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피니는 살아 있는 동안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 이생에서 완전한 성화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성화를 경험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죽을 만큼 기도하라’ 등이 있습니다.

1761년 8월 17일 인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효과적인 침례교 선교사가 될 윌리엄 캐리가 영국 노샘프턴셔에서 태어납니다.

1099년 8월 19일 출발한 지 3년 후, 제1차 십자군 군대가 팔레스타인 도시 아스켈론 전투에서 사라센 세력을 물리칩니다. 그 후 한 세기 이상 기독교인들이 성지를 지배했습니다.

1732년 8월 18일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기독교인들이 감격적인 고별 예배에서 100곡의 찬송가를 부르고 레오나드 도버와 데이비드 니치만을 서인도 제도의 노예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회원이 600명에 불과했던 헤른후트는 1732년부터 1742년까지 7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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