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배드민턴보다 위대한 안세영
안세영의 배드민턴을 보고 있으면 온몸이 짜릿함을 넘어 둔중하게 떨려오는 울림을 느낀다.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의지, 목표를 향한 열정과 노력,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안세영이 포효할 때 우리 역시 우리를 둘러싼 삶의 역경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이런 감동은 오직 현장에서 직접 싸우는 선수들만이 줄 수 있다.
몇 해 전 강릉국제영화제를 구경 갔을 때 일이다. 레드카펫 행사에 안성기 배우가 등장해 환호성이 컸는데 곧이어 모 국회의원이 레드카펫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고요 속의 워킹이 시작됐다. 어디 호텔 사장, 구청장, 도의회 의원들이 줄줄이 오르자 박수는커녕 야유가 쏟아졌다.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축제에 정치인, 기업가, 지역유지들이 왜 얼굴을 들이미는 걸까.
한때 수많은 세계챔피언을 배출한 한국 복싱은 이제 완전히 몰락했는데 웨딩뷔페나 초등학교 강당 같은 데서 한국챔피언 결정전이 열리고 대회 포스터엔 선수보다 협회장, 부회장, 명예회장, 연맹 사무총장, 홍보이사, 병원장, 대형교회 목사, 유명 사찰 스님 등의 얼굴과 이력이 빼곡하다. 왜 망했는지 불 보듯 뻔하다.
경기는 선수가 한다. 국가대표는 오직 실력으로 뽑는다. 협회는 선수가 다치면 보호하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국제대회 때마다 이상한 국면이 펼쳐진다. 선수 대신 협회 대표나 연맹 임원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 한다. 학연이나 인맥, 협회의 입김이 선수선발에 작용한다. 선수가 다쳐도 협회는 당장의 실적에만 눈이 뒤집혀 혹사시킨다. 지원은커녕 공금을 횡령하고 선수들에게 돌아갈 포상을 가로챈다.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4강에 오른 여자 배구의 김연경 선수에게 배구협회 임원은 "포상금이 얼마인 줄 아느냐" 묻더니 연맹 총재, 협회장, 금융회사 회장 이름을 읊어댔다. 김연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배구선수인데 그깟 포상금이 뭐 대수라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여자 배구팀 회식을 김치찌개집에서 한 협회다. 보다 못한 김연경이 선수들을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을 반대한 선수들을 향해 "이기적인 철부지들"이라 비난한 높은 분들은 지금 함부로 날아오는 오물풍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때 단일팀을 밀어붙인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은 자원봉사자에게 갑질과 막말을 한 바 있다. 그는 대한수영연맹회장 재임 당시 박태환의 올림픽 포상금을 마음대로 유용하기도 했다. 이번 안세영의 작심발언 사태에서도 선수의 입장을 헤아리기는커녕 표현방법이 서투르다느니 다른 선수들은 불만이 없다느니 따위 훈장질을 해댔다. 그러더니 이번 파리올림픽에서의 호성적이 자신이 기획한 국가대표 선수단 해병대캠프 입소 덕분이라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선수를 망치는 어느 협회를 보며 철저하게 실력으로만 선수를 선발하는 양궁협회의 공정한 시스템이 새삼 대단하게 여겨진다. 입은 닫고 지갑을 여는 대신 선수의 공을 가로채고 생색내는 어느 '꼰대'를 보며 평생 '뒷것'으로만 살다 얼마 전 별세한 진짜 어른 김민기 선생이 벌써 그립다.
무릎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을 참아내면서 안세영은 마침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개인으로서 꿈을 이룬 그 순간 대의를 위해, 자신만이 아닌 모든 선수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안세영이 요구하는 바는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다. 선수 부상관리를 해줄 것, 세부종목에 맞는 훈련방식과 시설을 제공해줄 것, 오직 실력으로만 선수를 선발할 것. 이게 다다. 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그녀는 온몸을 내던지고 자기 생을 다 걸고서 끝내 협회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존재, 배드민턴이라는 종목보다 위대한 선수가 됐다. 안세영은 일개 협회의 소유물이 아니다. 국민들은 이번 사태를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우리는 안세영의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이다.(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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