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찬구의 스포츠 르네상스] 파리올림픽, 국위 선양 시대 가고 ‘자아실현 세대’ 왔다
즐기며 축하하는 우리 선수들, 매력적 세계시민 면모
우리는 무엇에 환호하고 무엇에 분노했나 돌아볼 때
파리올림픽이 폐막했다. 무관심 올림픽이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대한체육회가 5개 정도라고 예상했던 금메달은 두 자릿수를 넘었다. 파리에 모아진 관심은 환호와 분노, 두 가지 극과 극 반응이다. 환호는 승리, 즉 메달 색깔에만 있지 않았다. 분노 또한 패배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에 환호하고 무엇에 분노했는가?
스포츠에서 승리는 기본적으로 최종 목표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세계 4위로 비약한 후 올림픽 강국으로 선전해온 대한민국 스포츠의 성장은 메달 획득을 통한 국위 선양이라는 절대 목표에 기반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엘리트 선수 육성을 목표로 시스템을 마련, 많은 투자를 해 왔다.
과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영웅이 되었던 많은 선수들을 기억한다. 88서울올림픽에서 12개의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5년밖에 안 된 중진국 대한민국 국민의 상처입은 자존감을 위로했다. 반면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은메달리스트들이 시상대에서 고개 숙이고 국민한테 죄송하다며 울먹이며 인터뷰하던 모습은 하나의 시대상이다. 승자를 축하해주고 패자를 위로해줄 여유도 없었다. 21세기 올림픽에서까지도 2008 베이징의 진종오, 2014 소치의 심석희는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국가대표는 국위 선양을 위해 싸우는 ‘전사’였고, 메달을 못 따면 미디어와 국민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우리 국가대표 가운데 파리올림픽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선수는 사격 김예지일 것이다. 금메달을 못 딴 선수가 이렇게 화제가 된 경우가 있었던가 싶다. 주종목 25m 권총에서 0점을 쏴서 탈락한 직후 기자가 울지 않았냐고 묻자 “0점 쐈다고 세상이 무너지나요? 인생에 사격이 전부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전 같으면 국가대표로서의 자격 운운하며 국민 욕받이가 되고도 남을 발언이었다. 하지만 국민은 그녀의 ‘쏘쿨함’에 찬사를 보냈다. 그녀에게 올림픽은 자아실현의 장이었고, 국민은 여기에 지지를 보냈다.
“하야타 선수가 저보다 모든 면에서 앞섰다고 생각하고 인정하고 배워 다음에 도전하겠습니다.” 탁구 신유빈이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 선수에게 패배한 다음 축하를 건네고 한 인터뷰 내용이다. 신유빈은 일본 선수에게 다가가 먼저 안아주고 축하해줬다. 예전에는 “한일전에서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는 지도자도 있었다. 그 시절 같으면 굴욕적이라며 논란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국민은 ‘삐약이’의 어른스러운 포용에 오히려 더 큰 응원과 격려를 보냈다. 그녀에게 일본은 딱히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경기로 전 종목을 석권한 양궁은 ‘공정 경쟁해서 실력이 최고인 선수를 뽑는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과 절차를 확립,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 다시 한번 조명되었다. 짬짜미, 밀어주기, 져주기, 예외, 연줄, 선배 우선, 병역 면제 고려, 나눠 먹기 등 스포츠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양궁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불합리한 관행을 혁파하고 프로세스를 확립한 정의선 대한양궁협회 회장은 이번 파리 올림픽의 또 다른 스타플레이어가 됐다. 마케팅의 단계별 목표 중에서 최고는 ‘존경받기’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차그룹은 최고의 스포츠마케팅을 했다.
배드민턴 안세영은 금메달을 딴 직후 공개적으로 대한배드민턴협회에 감정을 표출했다. 협회의 지나친 통제와 규율에 의해 개인의 자율에 기반한 발전이 저해됐다는 얘기였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올림픽 이후 가려질 전망이지만, 협회의 입장문은 선수 개인 입장을 다 받아줄 수 없다는 맥락이었다. 양측의 인식의 차이가 커 보인다. 선수가 올림픽대회 중 협회 체제를 비판하고 나선 전례없는 사건에 국민적 관심이 몰려 있고, 여론은 선수의 용기를 지지하는 쪽이 우세하다.
2000년 중학생 수영 국가대표 장희진이 기말시험을 보기 위해 선수촌을 나가자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한 골프선수가 국가대표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하자 팔 힘만 가지고 천장까지 밧줄을 타게 하는 바람에 샷 감이 무너져 한동안 고생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도 선수들의 정신력이 해이해졌다고 대한체육회 주관으로 해병대 훈련을 시켜 논란이 있었다. 진천선수촌에서는 새벽 운동을 의무화하고 집단으로 산악 구보를 시키고 와이파이를 차단하는 등의 조치를 하기도 했다. 집단주의가 중요시되고 전통적인 훈련관행이 의식처럼 유지된다. 선수들은 과학적, 합리적, 자율적이길 원하는 경향이다.
메달을 딴 선수들의 치열하고 압도적인 경기력에 감동받고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국민의 환호는 메달 획득 여부와 무관하게 선수들이 보여준 당당하고 멋진 세계인으로서의 모습에 향했다. 올림픽 메달의 절대 가치였던 국위 선양 프레임의 눈에 띄는 쇠퇴다. 일단 대한민국이 매력 있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리고 국민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올림픽 메달의 대체재가 많다. BTS와 오징어게임이 있고, 전 세계인이 삼성과 현대자동차의 고객이다. 젊은 세대들은 디지털을 통해 전 세계로 연결되어 로컬이 아닌 세계 시민이다. 국가주의에 입각 국위 선양의 수단이었던 스포츠의 효용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기 위한 요소들로 확대, 변화됐다.
이번 파리올림픽은 현재 대한민국 스포츠가 맞고 있는 전환기적 성격을 노정시킨 쇼케이스다. 한 시대의 종언이고, 세대 간의 가치 대립이다. 국가주의와 개인의 자아 실현, 집단주의에 입각한 통제와 자율주의, 공정과 상식에 기반한 프로세스와 결과 지상주의에 입각한 과정의 희생, 상명하복과 수평적 소통 등 가치충돌이 눈에 띈다. 2024년 대한민국 사회와 국민은 스포츠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이에 대한 방향 설정과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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