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이 일자리를 잃었다…AI시대, 당신은 ‘대체 불가’인가 [여기힙해]
“배우는 선택 받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물론 어떤 영감을 받아, 그것과 맞아 떨어지는 작품을 만났을 때 잘 발화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지난 10일 서울 성동구 ‘앤더슨씨 성수’. 배우 천우희가 세계적인 가구 디자이너 젠스 리솜의 의자 앞 영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옆 방에서는 배우 지창욱의 영상이, 아래층에서는 배우 류승룡과 박정민의 영상이 흘러 나옵니다. 이 영상들을 사진 촬영할 수는 있지만, 영상 녹화할 수는 없습니다. 배우들의 저작권이 담긴 영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사람은 배우 류덕환입니다. 최근 국내 영화·드라마 업계는 제작편수가 급감하면서 배우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드라마 제작 건수는 총 123편(방송·OTT 포함)으로 코로나 이후 첫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올해는 두 자릿수로 줄어들 것으로 추산됩니다. 영화업계도 코로나 전후로 제작됐다 개봉 못한 창고 영화들의 재고 털이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내 대표 제작사인 CJ ENM은 영화계 돈줄을 조인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류덕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왜 배우들은 저작권이 없는 것일까, 배우들은 선택받지 않으면 자신의 영감을 표현할 수 없나? 배우들은 대체 가능한 존재인가?’
인공지능(AI)으로 인한 딥페이크(인간 이미지 합성 기술)가 발전하는 지금, 배우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돈이 되는 여기힙해 열 다섯번째 이야기는 전시 ‘NONFUNGIBLE(대체불가)’ 입니다.
◇저작권 없는 배우들
현재 법 체계에서 배우들은 직접 저작물을 창작한 저작자가 아니기 때문에 저작권을 갖지 않습니다. 법에서 이들은 ‘실연자’로 규정됩니다.
‘아티스트’ 군에서 배우들은 자신의 영감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배우 천우희는 “어떤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도 그것을 표현하기 보다는 빨리 ‘오케이’를 받는 것에 집중해요. 그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배우 박정민도 “저는 자존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하는 거예요. 맞춰주지 않으면 절 미워할 것 같거든요. 전 미움받기 싫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배우 겸 감독인 류덕환이 독립영화가 아닌 전시로 표현한 점은 흥미롭습니다. 이 전시에서 중요한 상징은 ‘의자’입니다. 의자에 앉아 영상을 바라봅니다. 배우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기분도 듭니다. 르동일 작가의 작품 ‘ETIK CHAIR’와 앤더슨씨에서 보유한 오리지널 빈티지 가구들은 “앉다”라는 행위적 의미를 넘어 “자리한다”라는 수행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배우와 관객은 모두 같은 의자에 앉지만 대체될 수 없는 ‘그때의 자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배우 천우희는 스칸디나비안 모던을 미국에 전파시킨 젠스 리솜의 의자와 매치합니다. 자신을 “취향도 없고 컨셉도 없으며, 평범하다”라고 말하는 그를 평범함의 미학을 가진 리솜의 가구와 매치한 것입니다.
배우 지창욱의 영상은 덴마크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폴 케흘름 의자 앞에서 펼쳐집니다. 지창욱은 “배우 지창욱과 인간 지창욱의 분리가 잘 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배우 지창욱이라는 사람이 또 제가 아닌 건 아니거든요. 카메라 앞에서 가식을 떨고 있는 사람도 지창욱이지요. 그러니깐, 나를 찾는다는 행위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배우 류승룡의 인터뷰에서는 완성된 거장의 분위기가 드러납니다.
“주어진 대본, 스텝, 콘티가 이미 있기 때문에, 배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택의 영역인 것 같아요.”
이런 그의 영상은 스웨덴을 대표하는 가구 거장 아르네 노렐의 소파 앞에서 재생됩니다.
◇인터넷 방송은 惡인가?
그 옆방에서는 미국의 혁신적인 디자이너 조지 넬슨의 가구 속에서 배우 박정민의 목소리가 흘러 나옵니다. 가장 많은 인파로 붐볐던 박정민의 방은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됐던 그가 인터넷 방송 트위치 스트리머 크루 ‘배도라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이 나옵니다.
“‘왜 배우한다는 XX가 트위치 생방송에 나가가지고 저러고 있지?’라는 얘기를 듣는 것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처음엔 좀 열이 받았었거든요? 뭐 이건 (예술은) 좋은 거고, 이건(인터넷방송) 나쁜거예요?”
전시가 끝나는 곳에는 관객을 위한 인터뷰 의자가 있습니다. 이곳에 앉아 관람객은 하나의 질문을 선택해 답변할 수 있습니다. 좁은 공간,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상당히 어색합니다. 시간 막대기가 줄어듦에 따라 의외로 진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영상은 QR코드로 다운 받아 소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렇게 촬영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내 얼굴에 목소리를 입힌다고 해도 진심이 전해질 수 있을까요? 배우 천우희는 대체 불가능한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배우들의 얼굴을 따서(복사해서) 그냥 내 모든 것을 따서 딥페이크로 만들거나, 연기를 할 순 있겠지만, 과연 그게 감정적으로 전달이 될까요? 어떤 감흥을 줄까요?”
해당 전시는 오는 25일까지 개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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