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일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나라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의 저자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교수는 “인생 성취의 8할은 운”이라고 말한다. 태어난 나라에 따라 평생 소득의 50% 이상이 결정되고, 부모가 물려준 DNA가 30%의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노력보다는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는지가 한 사람의 평생 소득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세계적 명저 <총, 균, 쇠>(재러드 다이아몬드)에서도 인류 역사와 문명 발전이 대륙마다 다르게 전개된 이유가 환경의 차이에 있음을 이미 증명한 바 있다. 한국의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의 의대 진학에 목매는 것도 기회의 유무, 인적·물적 네트워크의 차이를 좌우할 이 ‘8할’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금융지주 연구소의 리포트를 보면, 금융자산이 10억원 이상인 부자 10명 중 7명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거주하고, 서울에서도 강남·서초·종로·용산구, 그리고 신흥 부촌으로 부상한 성동구에 집중돼 있다. 부자일수록 근로소득 비율은 낮고 상속증여·부동산·사업소득 비율이 높았다. 김 교수와 다이아몬드의 논리대로라면 이 ‘부자’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도 있었겠지만 ‘금수저’ ‘은수저’로 태어난 덕을 톡톡히 봤을 확률이 매우 높다.
올해 세법 개정안의 핵심은 대규모 상속세 감면이다.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고, 상속세 자녀공제액을 5000만원에서 5억원으로 10배 늘려주는 것이다. 최고세율이 낮아지면 30억원 넘게 물려준 2400명(지난해 기준)의 재산에 매겨진 세금 1조8000억원이 줄어들게 된다. 세법 개정에 따른 상속·증여세 감세효과는 향후 5년간 18조6000억원에 달한다.
세 부담 없이 자식한테 공제한도인 5억원까지 꽉 채워 물려주는 게 가능하려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할까. 별다른 소득이 없는 노부부가 집을 담보로 매달 주택연금을 받아 생활한다고 가정해보자. 주택연금은 공시가격 12억원(시세 17억원대)인 주택까지 가입 가능한데, 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서울의 주택연금 가입 평균 주택가격은 5억5000만원 정도다. 가입 주택 가격을 5억원으로만 잡아도 자녀가 1명이면 12억원(주택연금 가입 5억+자녀공제 5억+기초공제 2억원), 2명이면 17억원, 3명이면 22억원은 있어야 세제 개편 혜택을 볼 수 있다. 통계청의 2023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순자산(자산에서 부채를 뺀 값)이 10억원쯤 되면 상위 10% 안에 든다. 다시 말해, 상위 10%에 안정적으로 들어갈 정도의 재산은 돼야 상속세 개편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는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아파트 값이 급등해 집 한 채 물려주려 해도 세 부담이 과하다는 여론을 수용한 것이라지만, 실제로는 국민 대다수의 삶과는 무관한 셈이다.
더욱이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거액의 상속을 받는 자녀의 나이가 한창 인생을 설계하고 확장해나가는 시기도 아니다. 보험개발원의 경험생명표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은 86.3세, 여성은 90.7세다. 상속이 이뤄진다는 건 부모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80대 중반 이후 사망 시 재산을 상속받는 자녀의 연령대는 적어도 50대 이상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나이 50이 넘은 중장년층이 최대 5억원까지 세금 없이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한다는 것 말고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5억원을 연봉으로 받는 근로소득자도 세금으로 1억7000만원 넘게 내야 하는데, 그냥 물려받은 사람은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지향하는 사회상은 무엇일까.
누군가의 세금을 깎아줘 생긴 빈 곳간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더 거둬 메워야 한다. 저출생·고령화가 가속화되고 복지 수요는 커지는 상황에서, 5억원을 상속받게 될 50·60대가 내지 않는 세금은 결국 미래세대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의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반대하는 상속세 개편은 어차피 되지 않을 일이라고 보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정부 개편안에 일단 반대 입장을 내놓긴 했지만 종합부동산세, 금융투자소득세에 대한 완화·유예론이 분출하는 민주당에서 언제 또 딴소리가 나올지 모를 일이다. 세제는 모든 정책 중 가장 고난도의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분야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상속자, 자산가에게 관대한 정책은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고 부에 대한 왜곡된 인식만 강화할 뿐이다.
이주영 경제부문장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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