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공화국이 위기에 빠졌다

기자 2024. 8. 11.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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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장악 통해 ‘공적 언어’ 파괴
어둠의 시대가 왔다는 증표
권력 비판자에 대한 감시 활동
이젠 폭력 대신 법·절차로 포장

“자세히 보면 지금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만, 그때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작가의 말’ 중 한 대목이다. 1978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지금까지 거의 150만부가 나갔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어 청소년들에게까지 널리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 조세희는 이 소설을 ‘유신시대’에 쓰기 시작했다. 조세희는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도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작가는 당선 소감에 자신이 깊은 세계로 가는 통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작가가 아닌 삼십 대 일반 직장 ‘시민’이 되어 칠십 년대를 살았다”. 작가는 소설을 쓰는 대신 재개발 지역 동네에서, 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세입자 가족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이가 되었다.

이들의 마지막 식사를 방해한 건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 담을 쳐부수며 들어오는 철거반이었다. 작가는 그날 작은 노트 한 권을 샀다. 우리 시대 수많은 ‘난장이’의 이야기를 담은 열두 편의 연작이 그렇게 시작됐다.

조세희는 노트를 샀던 날 자신이 한 경험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 놓고 있다. 소설 속 마을을 떠나는 난장이 가족의 마지막 식사는 철거반의 쇠망치질로 중단된다. 이 가족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던 명문대 중퇴생 ‘지섭’은 이들에게 주먹을 힘껏 날린다. 작가는 그날 자신이 느낀 분노를 이렇게 드러냈던 게 아니었을까? 물론 ‘지섭’은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나간다.

철거반의 철퇴와 쇠망치, 지섭이 날린 분노의 주먹, 피투성이가 된 지섭은 유신시대의 ‘폭력’과 ‘대항폭력’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조세희는 이 시대의 권력을 “‘비언어’로 우리를 괴롭히고 모독하는 철저한 제삼세계형 파괴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작가는 이 비언어의 폭력에 ‘언어’로 맞서겠다는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쓴다.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제 가혹한 물리적 폭력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모독하는 이들은 없다. 제대로 된 선거도 있고, 시민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대표자들을 선출할 뿐만 아니라, 공개 토론도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렵게 만든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는, 공화국이 위기에 빠졌다는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그 위기가 폭력 대신 ‘법’과 ‘절차’로 포장되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권력이 형식적 절차를 거친 방송장악을 통해 ‘공적 언어’를 파괴하고 있다. 이동관, 김홍일, 이진숙으로 이어지는 방송통신위원장 임명과 탄핵 과정,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재위촉 과정은 공적 절차의 필요성마저 의심케 한다.

공적 언어의 상실은 언제나 어둠의 시대가 왔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언어를 빼앗겼다는 것은 노예가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어를 빼앗긴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식민지에 살게 된다.

공적 언어의 파괴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국가기관이 절차를 활용해 권력의 부패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한 예로, 국민권익위원회는 ‘공직자의 배우자가 고가의 선물을 받아도 직무관련성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하여 권력이 법적 절차를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세력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검찰이 대통령 명예훼손 수사를 하면서 정치인·언론인을 포함해 3000여명에 이르는 이들의 통신 기록을 조회했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검찰은 반박 대신 모든 게 정당한 절차라고 말한다.

공적 언어를 빼앗는 일, 부패에 면죄부를 주는 일, 권력 비판자를 향해 감시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 이 모든 일 뒤에 ‘유신시대’부터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다 이제 주인 행세를 하는 검사들의 정부가 있다. 이들이 ‘법’이란 철퇴를 들고, ‘절차’란 쇠망치를 휘두르며 우리가 어렵게 만든 민주주의란 담벼락을 깨부수고 있다.

‘권력’이 내놓고 (‘선’ 대신) ‘법’을 가장하고 공화국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자선이고, 희망이고, 진실이며, 정의라 말하고 있다.

조세희가 써 내려간 ‘난장이’의 저항은 “파괴를 견디고” 밤을 새워 언어를 지켰기에 가능했다. “잘 단결해 무서워하며” 이 시절을 건너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민주주의를 쓸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공화국이 위험하다.

김만권 정치철학자

김만권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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