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길의 채무일기]죄와 빚

기자 2024. 8. 1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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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를 쓰던 친구는 1년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을 24시간 카페의 흡연실에서 보냈다. 테라스를 개조해 만든 흡연실은 밖에서 카페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드는 공간이었는데, 덕분에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나며 친구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유리창 밖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종종 괴롭고 자주 외롭게 보였다.

우리를 한숨 쉬게 하는 것들

나는 이따금씩 아무런 기척 없이 그의 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 그는 약속도 없이 나타난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 ‘죽겠다’는 말을 인사 대신 내뱉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소용없는 위로를 하는 데 몇 시간을 쓰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죽겠다’는 말은 그의 상태가 비교적 멀쩡할 때 나오는 ‘정상’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힘들고 지친 날이면 그 ‘죽겠다’는 말을 듣기 위해 매캐한 흡연실을 찾아갔다. 항상 일정한 모양으로 돌아오는 그 대답을 들으면 요동치던 기분도 금세 잠잠해졌다. 친구는 마치 고독한 기운이 고인 연못의 정령 같았고, 나는 그 정령을 찾아 겨우 ‘HP’를 회복하는 ‘쪼렙’의 용사 같았다. 그리고 용사는 그때 알았다. 언제 접속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게임 속 ‘NPC(None Player Character)’는 무척 쓸쓸하고 외로운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변함없는 고독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은 언제나 플레이어라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미션을 주었다. 단편영화 제작비 지원을 위해 작성한 신청서의 오타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오직 글쓰기만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그의 투박하고 낡은 노트북을 받아 들고는 신청서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더 간절한 느낌, 아니 처절한 느낌으로 문장을 고쳐 쓰면서 ‘이렇게 해야 돈을 준다’며 친구를 설득했다. 그 모습을 힘없이 지켜보던 친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노트북을 뺏으려던 순간, 화면에 띄워 있던 워드프로세서 화면이 인터넷 창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노트북을 재빨리 빼앗아 덮었지만, 그땐 이미 손보다 눈이 빠른 내가 ‘○○스위스저축은행’이 적힌 페이지를 보고 난 후였다.

“너 대출 알아보는 중이야?” 나는 속삭이듯, 그러나 그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릴 만큼 큰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얼굴이 붉어진 친구는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다가 결국 영화 제작비 지원 사업에서 떨어지면 대출을 내보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무직자와 학생에게 저금리 대출을 해주는 시중은행은 없다. 제2금융권이라 불리는 저축은행 역시 마찬가지다. 친구는 이런 이유로 대출을 모두 거절당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를 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행이라고 했지만, 친구는 씁쓸하게 웃다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말할 수 있어야 하는 비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서울역 앞에 서서 그때 그 한숨을 떠올렸다. 돈이 사라진 지 6개월. 카지노 앞에 가면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두 배, 열 배 되어 다시 돌아온다던 돈은 그것이 내 것이라는 증거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찰서를 수십번 방문했지만 ‘방법이 없다’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엄마가 있는 고향집으로 내려가려 했다. 모든 걸 털어놓고 도움을 받으려고. 그러나 막상 역에 도착하자 ‘사기를 당해서 집 보증금도 날리고 알거지가 되었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신호가 몇번이나 바뀔 때까지 횡단보도에 멍하게 서 있었다. 이제 갈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버스 창에 비친 내 모습은 7년 전에 보았던 친구의 얼굴과 같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주인공 안토니오가 빚을 갚지 못하자, ‘심장 부근의 살 1파운드를 베어가겠다’는 계약을 이행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을 중재하는 판사는 ‘살점 1파운드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져가야 한다’고 판결하며 샤일록을 파산시킨다. 이 오래된 이야기는 종교, 민족, 이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이 이야기에서 ‘돈보다 생명이 우선’이라는 인간 사회의 관용을 읽는다.

하지만 돈이 없는 것은 게으르고, 빚에 유혹당하는 것은 미련하며, 빚을 내는 것은 무모하고 빚을 갚지 않는 것은 나쁘다고 여기는 사회의 사람들은 모두 샤일록을 피해자라 여기고 그에게 감정을 이입할 것이다. ‘샤일록’ 사회의 사람들은 서로를 탓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난과 빚을 철저히 숨기고 그것을 곪아 문드러진 상처로 품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보려고 하지 않는다. 돈이 없는 사람은 모두 게으른 사람이 아니고, 빚은 유혹하는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는 보지 못한다. 빚을 져야만 하는 개인의 절박한 상황과, 그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의 처지와 굴욕감에 대해서.

복길 자유기고가

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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