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明 연합군, 소서행장 주둔한 순천 왜성 수차례 협공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선일회계법인 고문 2024. 8. 1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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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意譯) 난중일기-이순신 깊이 읽기 <68> 무술년(1598년) 1월 1일~10월 2일

- 수·육군 함께 치자 왜 기세 꺾여
- 배도 버려둔 채 산으로 도망가
- 명나라 백여 척 배들 진에 도착

- 明 유정제독 돌연 순천으로 후퇴
- 7차 걸쳐 치열했던 왜교성 전투
- 많은 사상자 내고 승전기회 놓쳐
- 사도첨사 황세득도 총탄에 전사

이해 2월 고화도에서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다. 6월에는 진린이 전라 바다로 이순신 옆에 오고 7월에는 조명 연합군이 처음으로 절이도에서 함께 싸운다. 8월 풍신수길이 죽자 일본군은 철수를 시작하고 이순신은 “한 척의 배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선진리성 전경.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왜성으로 당시 건물과 구조물을 일부 복원해 놓았다. 이번 호 난중일기에 나오는 순천 왜교성과는 다른 장소이지만, 당시 왜성 모습과 특성을 여기서도 떠올려볼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전투! 11월 19일의 노량 관음포해전! 드디어 지루하고 참혹했던 임진 7년 전쟁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무술년(1598년) 1월

1월1일[2월6일] 맑음.

늦게 잠깐 눈이 내렸다. 경상수사(이순신, 李純信)와 조방장(배흥립) 및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 고하도에서 맞이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설날의 모습이다.

내일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전쟁 중이라 해도 새해를 맞은 장수들은 모두 모여 함께 미래를 축원한다.

1월2일[2월7일] 맑음.

나라 제삿날이라 출근하지 않았다. 이날 새로 만든 배를 토괴에서 내렸다(완공했다). 해남현감(유형)이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송대립 송득운 김붕만이 각 고을로 나갔다. 진도군수(선의문)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1월3일[2월8일] 맑음.

이언량 송응기 등이 산(山)… (이하 글자가 빠졌음)

1월4일[2월9일] 맑음.

무안현감에게 곤장을 쳤다.

(이후 1월5일에서 9월14일까지 빠져있음)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남해충렬사 안에 이순신 장군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무술년(1598년) 9월

이 달은,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왜를 총공격하기 위해 조·명 연합으로 편성된 4로군 가운데 수로군 대장)의 명나라 수군이 합력하고, 육지에서는 권율의 조선 육군과 유정(4로군 중 서로군 대장)이 이끄는 명나라 육군이 합력하여, 소서행장이 주둔하고 있는 순천왜성을 여러 차례 협공한다.

9월15일[10월14일] 맑음.

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일제히 선단을 움직여 나로도(羅老島)에 가서 잤다.

9월16일[10월15일] 맑음.

나로도에 머물면서 도독과 함께 술을 마셨다.

9월17일[10월16일] 맑음.

나로도에 머물며 진린과 함께 술을 마셨다.

9월18일[10월17일] 맑음.

오후 2시경에 군사를 움직여 방답에 가서 잤다.

9월19일[10월18일] 맑음.

아침에 좌수영(여수)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니 눈에 보이는 것들이 참혹했다. 자정 경에 달빛을 받으며 하개도(何介島)로 옮겨 대었다가 날이 밝기 전에 다시 군사를 움직였다.

9월20일[10월19일] 맑음.

오전 8시경 묘도에 이르니 명나라 육군 유제독(유정)이 벌써 진격을 개시했다. 수군과 육군이 모두 협공하니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군이 드나들며 대포를 쏘았다.

9월21일[10월20일] 맑음.

아침에 진군하여 혹은 활을 쏘기도 하고 혹은 대포를 쏘기도 하였다. 종일 적과 싸웠으나 조수로 물이 매우 얕아져서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 싸울 수가 없었다. 남해의 왜적이 경쾌선을 타고 들어와서 정탐하므로 허사인 등이 추격했다.

적은 육지에 내려 산으로 도망가므로 부득이 그들의 배와 여러 가지 물건들만 빼앗아 왔다. 이 물건들은 바로 도독(진린)에게 바쳤다.

9월22일[10월21일] 맑음.

아침에 공격을 계속하여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사이에 명나라 유격(遊擊,계금)이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명나라 군사 11명이 탄환을 맞고 죽었다. 지세포 만호와 옥포 만호도 탄환에 맞았다.

9월23일[10월22일] 맑음.

도독(진린)이 전날의 패전에 대해 화를 내면서 서천만호 및 홍주대장(代將)과 한산대장(代將)에게 각각 곤장 7대씩 치고, 금갑도만호, 제포만호, 회령포만호도 함께 곤장 15대씩 맞았다.

9월24일[10월23일] 맑음.

진대강(명나라 제독 유정 휘하의 천총)이 돌아갔다. 원수(권율)의 군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충청병사(이시언,서로군 소속)의 군관 김정현이 왔다. 남해 사람 김덕유 등 5명이 와서 그 고을에 있는 왜적의 정보를 전하였다.

9월25일[10월24일] 맑음.

진대강이 돌아와 유 제독의 편지를 전했다. 이날도 육군(서로군)은 공격을 하려고 하나 기구(공성누차)가 완전치 않아 못한다고 하였다. 김정현이 와서 만났다.

9월26일[10월25일] 맑음.

육군의 기구가 아직 갖춰지지 못했다. 저녁에 정응룡이 와서 북도(北道, 함경도)의 일을 이야기했다.

9월27일[10월26일]

아침에 잠시 비가 뿌리고 서풍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명나라 군문(軍門) 형개(邢玠)가 글을 보내어 수군이 신속히 진격한 것을 칭찬하였다.

식후에 진 도독(진린)을 만나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종일 바람이 크게 불었다. 저녁에 신호의가 와서 만나고 잤다.

9월28일[10월27일]

맑으나 서풍이 크게 불어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 수가 없었다.

9월29일[10월28일] 맑음.

9월30일[10월29일] 맑음.

이날 저녁 명나라 수로군의 왕 유격(왕원주), 복 유격(복일승), 이 파총(이천상)이 배 100여 척을 거느리고 진에 도착했다. 이날 밤 불빛이 휘황하게 비치니 적의 무리는 간담이 떨어졌을 것이다.

▶무술년(1598년) 10월

유정제독이 돌연히 순천으로 후퇴하겠다고 하자 7차에 걸친 왜교성 전투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별 소득 없이 끝난다.

자주력을 잃고 남의 나라에 의존해 온 조선은 부득이 이 전투를 끝낼 수 밖에 없었다. 유정과 함께해 온 권율은 유정의 후퇴 결정을 저지하지 못했다.

10월1일[10월30일] 맑음.

도독(진린)이 새벽에 유 제독에게 가서 잠깐 서로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정은 다음날 인시(새벽 4시)에 순천왜성을 공격키로 약속했고, 이미 공성기계도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한다.

10월2일[10월31일] 맑음.

오전 6시에 진군했는데 우리의 수군이 먼저 앞장서 나가 정오까지 싸워 많은 적을 죽였다.

사도첨사(황세득)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이청일도 역시 죽었다.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문, 강진현감 송상보 등은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 조명 연합 육군(서로군)과 연합수군(수로군)은 이날 왜적을 제압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그날 명나라의 최고 장수인 유정의 태도는 이상했다.

공성기계만 늘어세워 놓고 독전하지도 후퇴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도망갈 명분과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자기 목숨이 아까웠을 수도 있고 많은 뇌물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이 왜교성 전투에서 연합군 측은 승전 기회를 놓치고 많은 사상자만 내고 말았으며, 그 후 며칠간 더 교전하다가 유정은 결국 7일 순천으로 철수(도주)했고 이순신도 진린과 함께 고금도로 돌아온다.

※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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