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할아버지에 한 자손’ 제주 백조일손역사관 개관
대정읍 묘역 옆에 352㎡ 추모공간
위패봉안실과 자료, 연구실까지
유족회장 “조각상·쉼터도 만들어
살아있는 역사교육관 역할 할 터”
1950년 음력 7월7일(양력 8월20일).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날 새벽.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절간고구마창고에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돼 구금됐던 이 지역 주민들이 트럭에 실려 대정읍내를 가로질러 신사동산을 거쳐 4㎞ 남짓 떨어진 섯알오름 일제 탄약고터에 이르렀다.
트럭이 창고에서 1㎞ 남짓 떨어진 신사동산을 지나자 생의 마지막임을 직감한 주민들은 신고 있었던 검정 고무신들을 군인들 몰래 트럭 밖으로 떨어뜨렸다. 가족들이 훗날 자신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도록 이승에서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트럭은 섯알오름 탄약고 터 앞에서 멈췄고, 군인들의 총소리가 여름날 새벽의 공기를 갈랐다.
날이 밝자 예비검속 희생자 가족들이 흙길에 떨어진 고무신들을 따라 학살현장까지 갔다. 그러나 가족들은 군과 경찰의 제지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유족들은 1954년 ‘칠석합동묘 유족회’를 결성하고, 공동으로 묘지부터 먼저 사들이고 ‘백조일손지지’라고 이름 붙였다.
‘백조일손’은 “서로 다른 132위의 조상이 한날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됐으니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다. 인근 공동묘지에 132명의 유해가 안장된 것은 1956년 5월18일이었다.
10일 오전 대정읍 상모리 백조일손지지에서는 ‘제74주기 섯알오름 사건 백조일손 및 행불 영령 합동위령제’와 함께 ‘백조일손 역사관’ 개관식이 열렸다. 묘역 왼쪽에 352㎡ 규모의 단층 건물로 문을 연 역사관에는 이런 내용의 역사가 오롯이 담겼다. 백조일손유족회가 기부한 1500여평의 토지 위에 지방비와 국비 5억원씩을 들여 331㎡ 규모로 들어선 역사관은 영상실, 위패봉안실, 자료실 및 연구실 등을 갖추고 있다.
이날 둘러본 역사관은 4·3과 6·25, 전국과 제주도의 예비검속 등 일련의 사건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전시됐다. 유족들이 수십 년 갖고 있던 각종 서류와 탄원서, 진실규명 활동의 역사 등을 전시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샌드 애니메이션을 통해 사건을 알 수 있게 했고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도 동영상으로 관람객들을 맞는다. 희생자들이 일제 강점기 찍었던 사진, 유족들의 도장, 1960년 국회에 냈던 탄원서, 1950년대 토지매도증서 등도 눈에 띈다.
역사관의 백미는 ‘부서진 비석’이다. 유족들이 1959년 5월8일 피눈물을 흘리며 ‘백조일손지지’라는 비석을 건립했으나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15일 상부 명령이라며 관할 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비석을 부숴버렸다. 이 비석은 그간 묘역 앞 유리함에 보관돼오다 이번에 전체를 공개하게 됐다. 2000년 학살터를 추가 발굴하는 과정에서 나온 수백발의 탄피도 전시됐다.
특히 ‘예비검속과 집단학살의 가해자’ 패널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서를 인용해 “군·경의 지휘·명령계통을 감안할 때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예비검속과 집단학살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명시하고 ‘경찰 측 지휘·명령계통’과 ‘해병대 지휘·명령계통’을 밝히고 있다.
역사관 건립을 주도한 고영우(62) 백조일손유족회장은 11일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부서진 비석 앞에서 제를 지냈다. 1992년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다른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백조일손의 할아버지는 너무도 억울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일만큼은 결코 소홀히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말했다. 고 회장은 선친의 유지에 따라 30살 때부터 지금까지 유족회 활동에 나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고 회장의 꿈은 역사관에 자그마한 조각상을 건립하고, 관람객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어 제주 서부지역의 살아있는 역사교육관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위령제 추도사를 통해 “제주도정은 백조일손 영령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4·3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백조일손역사관을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추모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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