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노인네 되기 싫어서…신문·스마트폰 끼고 살지요
# 도서관 신문 열람대 점령
- 신문 탐독하거나, 필사하거나
- 익숙한 ‘올드미디어’의 습관화
- 서동·금샘도서관에 ‘출근 도장’
# 알고리즘의 마법 유튜브
- 뜬 시간을 메울 용도로 쓰거나
- 적막 깰 백색 소음으로 틀어놔
- 첫 화면 추천 영상 보는 이 많아
# 사회와 유대감 지속
- 우리동네 돌아가는 얘기 알면
- 주변 지인들과 말할거리 얻어
- 생산적인 행동으로 여겨 뿌듯
“신문을 와 읽냐고? 마 그냥 세상 돌아가는 것 좀 볼라카는 기지.”
지난 9일 오전 9시 부산 금정구 서동도서관. 신문열람대 앞에 선 박상모(가명·69) 할아버지가 지면 위 2024 파리 올림픽 태극전사의 활약상에 눈길을 고정한 채 답했다. 이곳 신문열람대는 열람실 바깥에 자리해 에어컨 냉기가 돌지 않는다. 앉을 만한 자리도 주변에 마땅찮았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TV나 휴대전화를 쓰면 되지 않느냐. 굳이 폭염을 뚫고 도서관까지 걸어오며 기력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재차 물었다. “마, 나는 이기 편해. 알라(어린아이) 때부터 신문 봤다 아이가.”
다음 날 오전 10시, 금샘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책상에 붙어 앉았다. 신문으로 보이는 종이 위 노트에는 무언가가 빼곡히 쓰였다. 할아버지는 작업에 열중한 듯, 펜을 잡은 손을 빼놓곤 신체에 아무런 미동이 없다. 무엇에 그토록 열중했을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알찬 일자리가 가득’. 그는 동네 소식지를 궁서체로 한 자씩 옮기고 있었다. 도서관의 침묵을 깰 수 없으니, 그가 일어날 때를 기다려 말을 걸어보려 했다. 아뿔싸, 그는 점심이 되도록 자리를 뜨지 않을 만큼 소식지를 탐독했다.
일상 속 빈틈을 채우는 미디어
국제신문 77번 버스는 지난 9, 10일 여덟 번째 행선지인 금정구에서 미디어 삼매경에 빠진 어르신들과 만났다. 이들에게 미디어 활용은 운동이나 여행과 같은 ‘작심 행동’이 아니었다. 어르신 열에 아홉은 박 할아버지처럼 ‘마 그냥’ 신문을 읽거나 유튜브를 시청했다. ‘마’가 ‘그냥’을 뜻하는 부산·경남 사투리니, 풀어 쓰면 ‘그냥 그냥’이 되겠다. 대단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미디어를 접하는 건 아니라는 말씀. 재밌으면 보고, 아니면 ‘마’ 넘기고.
달리 말해 미디어 여가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받기보단 일상 속 빈틈을 채우는 게 핵심이다. 시간이 뜰 때마다 여갓거리를 물어다 주는 주요 수단이 돼준다. 이웃과의 정서적 거리가 멀어진 오늘날은 더욱 그렇다. 옛 사랑방이나 장터를 대신해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이야기 같은 흥미로운 ‘썰’을 들려준다. 어르신에게 친숙한 ‘올드 미디어’ 신문은 그 첨병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미디어라고 크게 다른 건 아니다. 지난 10일, 재차 금정도서관이다. 열람실 바깥 휴게 공간, 벤치 의자에 김모(60대) 할아버지가 먼 산을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른손은 휴대전화를 쥐고, 귀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액정 화면 속에선 유튜버가 위아래로 꺾인 주가 차트를 설명했다. 귀로만 들어선 들릴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시선이 화면 바깥을 향해 있을까. “유튜브예? 마 그냥 틀어놓고 있지요. 너무 조용하니까 그냥 마, 재미로 듣는 거지. 꼭 봐야 해서 보는 기 아이다아입니까.”
미디어는 때로 뜬 시간을 메울 용도로, 한편으론 적막과 고요를 깨줄 방백이자 백색 소음으로 활용된다. 방송 매체가 특히 그렇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낮잠을 청하는 할머니, 분명 소파에 드러누워 코까지 골고 있는데 TV 채널을 돌리면 “나 아직 안 잔다”며 리모컨을 회수해 가는 할아버지. 누구나 한 번 정도는 가정에서 목도했을 광경이다. 적극적으로 매체를 활용해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시간에 대비, ‘마 그냥’ TV나 라디오를 틀어놓는 시간 역시 상당하다.
스마트폰을 쓰는 어르신의 비율이 대폭 늘어난 현재(방송통신위원회 지난해 기준 60대 61%, 70대 23.2%), 디지털 미디어는 실내에 국한된 TV·라디오를 넘어 야외에서의 공백도 메운다. 알고리즘이 워낙 발달했으니 재미있는 영상을 찾는 수고도 덜 하다. 유튜브 첫 화면부터 본인 취향의 영상이 가득하다. 김 할아버지는 “식사 뒤 여유 시간이나 지하철 등으로 이동할 때 유튜브를 본다. 주로 건설 공사 장면 같은 개인적 관심사나 어릴 적 감명 깊게 봤던 영화를 선호한다. 내가 직접 검색해 들어가는 건 아니고, 첫 화면에서 바로 눌러 들어가는 편이다”고 말했다.
이야깃거리 창고, 신문
재미도 재미지만, 일단 세상 흘러가는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게 ‘방구석 노인네’ 신세를 피하는 첫 번째 걸음이란다. “옛날 어른들이 괜히 ‘뉴스도 좀 보고 살아라’고 한 게 아니야. 안 그럼 방구석 노인네처럼 눈만 끔뻑끔뻑 뜨고 살아.” 서동도서관 박 할아버지의 일침이다. 아까 신문은 ‘마 읽는다’고 하신 그 분이다. 이분, 사실 ‘마 그냥’이 전부는 아니었나 보다.
어쩌면 ‘마 그냥’으로 얼버무려진 미디어 여가의 진짜 재미가 이것일지 모른다. 어르신들은 미디어를 통해 시사를 알고, 주변 지인과 말할 거리를 얻는다. 이를 통해 지인은 물론 세상과도 유대감을 얻는다. 평소 공부하는 기분으로 신문을 읽는다는 유상영(가명·70) 씨가 그렇다. ‘신문 자주 읽으시냐’는 한 마디 물음에 기자에게 들려주는 지면 비평이 날카롭다. 10분간 막힘없이 진행된 대화를 간추리자면 이렇다.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거리를 찾으려고 신문을 봐요. 동네 사건사고 기사가 딱 그렇지. 평소에 신문 자주 읽으면 모르는 이야기라서 말 못 할 일이 안 생긴다고. 그런데 A 신문은 사회면 기사가 너무 길고 어려운데, B 신문은 짧게 써도 머리에 쏙쏙 들어와요. 신문은 국민학생이 읽어도 딱딱 이해되게 써야 하잖아. 그런데 A 신문은 대학생이나 박사들한테는 읽히지, 우리한테는 너무 어려워. 그리 상세하지도 않은데 말만 고상하게 쓴다고. 점심에 간짜장 하나 시켜 놓고 밥상에서 신문 좀 볼라 하면 글이 너무 어려워가 한참 들여다봐야 하니까 면이 다 불어뿐다고. 그래도 다들 사설은 괜찮게 써. 나는 신문 볼 때 사설을 제일 먼저 읽거든요.”
유 씨의 사례처럼, 새로운 정보와 사실을 알고 숙지하는 행위가 모종의 효능감을 느끼게 해준다. 다른 여가에서는 얻기 힘든 감정이다. 미디어의 재미다.
이에 대해 박민성 민생정책연구소장은 “미디어 여가를 즐기는 어르신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어르신은 그저 시간을 때우기보다는 자신의 행동이 무언가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행동이기를 바란다. 생업 전선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으니 그런 욕구가 더욱 클 수 있다”며 “어르신을 위한 여가 프로그램을 발굴·개발할 때도 이 같은 효능감을 느낄 수 있게 고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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