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가사노동 비용 절감 논의에 앞서 [세상읽기]

한겨레 2024. 8. 1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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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지난 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공항사진기자단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돌봄 노동을 처음 인식한 계기는 영화 ‘헬프’와 선배의 고민 토로였다. 영화 ‘헬프’는 196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가정부 얘기를 다룬다.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차별은 여전히 극심하던 시대를 다루면서 돌보는 사람이자 노동자이자 2등 시민의 지위를 겸하는 흑인 여성들의 불합리한 삶을 그려낸 영화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백인 주부가 행하는 의심 없는 차별의 천진난만함이었다. 자신을 키웠고 자녀를 돌보는 흑인 가정부를 더러운 병균처럼 바라보는 시선에는 망설임도, 의문도 없었다. 자라면서 깊이 의존했을 존재를 더럽다고 느끼려면 얼마나 심각한 인지적 해리가 일어나야 하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선배의 고민은 의외로 그 인지 부조화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알려 주었다. 선배는 자녀가 부모나 선생님을 대할 때와는 달리 ‘이모님’ 말은 자주 무시하고, 무리한 요청을 하며, 기분이 나쁘면 거칠게 화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을 돌봐주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란 인식이 강해서인 것 같다고 걱정하는 것을 들으며, 사람을 특정한 지위나 계급 등으로 인식하게 되면 차별과 혐오, 무례가 쉬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특별히 깊은 자아분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다음으로 돌봄 노동은 내 일의 문제가 되었다. 돌봄 노동자들이 법정에 섰다. 그들은 주로 돌봄 대상자들을 정서적, 신체적으로 학대한 일로 재판받았다. 처음에는 돌봄 대상자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왔다. 직업적 돌봄은 주로 취약한 이들(노인, 환자, 장애인, 아동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 사이에 신체적, 정신적 위계질서가 잡히기 쉬운데, 돌봄이 노동으로 치환되는 순간 그 위계질서는 학대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되기 십상이다. 돌봄 대상자를 폭언 및 폭력으로 제압하고, 특정 행동양식을 불합리하게 강제할수록 돌봄 노동의 강도는 낮아지는데 돌봄 대상자가 취약하다 보니 그러한 방식으로 노동 강도를 낮추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그 과정에서 돌봄 대상자가 겪게 되는 고통은 학대 행위의 수위보다 강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돌봄의 특성 때문이다. 돌봄은 곧 생활이기에 돌봄에서의 학대는 반복적일 수밖에 없고, 돌봄 대상자가 ‘노동의 대상’으로 치환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돌봄 대상자에 대한 모욕을 수반한다.

최근에는 돌봄 노동자들이 처한 한계적 상황이 눈에 밟힌다. 돌봄 과정에서의 학대는 단계적으로 심각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부터 돌봄 대상자를 재판에 이를 정도로 학대하기보다는, 열악한 돌봄 노동 환경 아래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노동 강도를 줄이고자 조금씩 위압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수단을 쓰게 되거나 유독 돌봄이 어려운 대상을 만나 참다가 분노가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학대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는 동안 돌봄 노동자들이 보조 인력 충원, 돌봄 노동 강도 축소 등 자신의 학대를 예방할 수 있는 구조적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도 보인다. 돌봄 학대의 비극은 돌봄 대상자와 돌봄 노동자 모두 인간성을 상실하는 과정에 놓이는 데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돌봄은 고용관계에 따른 노동으로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다. 돌봄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돌봄 노동자와 돌봄 대상자는 서로에게 대상화되지 않고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돌봄 노동의 핵심이다. 돌봄 노동자를 차별과 혐오의 시선, 열악한 노동 환경에 던져 놓을 경우, 그들의 돌봄에는 분노와 억울이 반영되고 돌봄 대상자는 노동 대상으로 치환된다. 돌봄에서의 학대는 돌봄 대상자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안기기 때문에 돌봄이 학대로 변질될 여건을 고스란히 남겨 놓은 채 고용관계에 따른 억압 및 감시와 사후적 처벌로 다스리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한편, 돌봄 대상자가 돌봄 노동자를 차별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로 불행한 인지 부조화이며 나아가 우리 사회에 차별의 감각을 확산시킬 것이다. 어느 쪽도 우리 사회가 감당해서는 안 될 일이다.

최근 서울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이 실시되며 필리핀 노동자 100명이 입국했다. 이들을 최저임금제에서 적용 제외하여 비용을 낮추자는 논의가 무성하고, 이를 돌봄 노동 전반으로 확산시키자는 제안도 나온다. 논의에 앞서 우리 모두 돌봄의 특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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