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보러 안동에 갔다 [양희은의 어떤 날]
양희은 | 가수
8월의 첫 주말, 길을 달리다 보니 제법 한산해서 서울 밖으로까지 마구 달리고 싶었다. 강변북로나 큰 길가로 태양 빛 닮은 주황색 능소화가 울타리를 잘 타고 올라 흐드러졌다. 다들 휴가 떠났나? 다 어디로 갔을까? 티브이(TV)로 올림픽 생중계 보면서 애들하고 치킨 배달시켜 먹으며 ‘집콕’하는 게 최고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긴 어딜 가냐? 집이 최고다. 속이 편치 않고 허전한 게 빵보단 나을 듯해서 가래떡 사려고 동네 떡집에 갔더니 휴가철이라 떡집도 잠시 쉬겠단다. 떡도 팔 게 없단다. 그래야겠지. 쉬어야겠지. 7말8초 한결같은 휴가철 좀 그렇다. 휴가란 나름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건마는 우리나라는 대기업→중소기업→소기업→자영업 등이 큰 일터 따라 덩달아 쉴 수밖에 없고, 게다가 아이들 방학에 학원도 쉬면서 일괄 휴가철을 맞는다.
7월 마지막 토요일, 친구 보러 안동에 갔는데 뭉게구름 떠 있는 파란 하늘 아래 햇볕 받아 투명한 초록의 논. 죄 녹여버릴 듯한 더위가 오랜만이었다. 그 모든 풍광이 좋아서 여름방학 그림일기를 다시 그리고 싶을 정도였다. 안동 임하면 금소리 방앗간 식구들 점심시간에 수저로 깍두기 얹고 먹은 고소한 콩국수와 간간짭짤한 장아찌 반찬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아버지께서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와 콩물을 만드는 따님의 솜씨였다. 그 동네엔 에어비앤비가 많아 보였다. 허름한 곳보다 정갈하고 비싼 숙소들이 외려 인기가 많단다. 마을 길 걷다가 버려진 농협 창고에 들어가 옛것을 살리면서 새롭게 젊은 공간으로 재탄생 시킬 것이라는 친구 얘기도 듣고, 옛것들이 묘하게 어린 날의 기억들을 되살렸다.
옛집을 편히 쓰게끔 개조한 숙소 마당엔 요즈음 보기 힘든 채송화, 금잔화, 분꽃들이 피고 돌확도 있어, 어렸을 적 우리 집을 떠올렸다. 앞마당의 포도나무랑 뒷마당 꽃밭에 철 따라 피어나는 한련화, 맨드라미, 나팔꽃, 옥잠화, 백일홍…. 공터에 많이 있던 달개비, 강아지풀, 샐비어꽃 뒤꼭지의 들큼한 꿀맛과 비 온 뒤 아카시꽃 향을 맡으며 후두둑 빗물 털며 훑어 먹던 맛! 여름꽃이 지면 씨를 받아 종이 접어 보관하고 꽃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점심을 잘 먹고 떠나기 전 안동포 짜는 어르신들 계신 곳에 가서 인사 여쭈었다. 서울로 가는 길엔 엄청난 소나기가 예닐곱번 지나갔고 심하게 쏟아지면 차 운행이 무서울 정도였다. 토요일 7말8초 덕에 집에도 순조롭게 도착했고, 많은 비 덕에 정발산 숲은 작년 재작년과 달리 열대우림 속 나무들처럼 울울창창하다. 겨우내 안에 들여 키우던 다육이들을 식목일 지나 마당에 내놓았는데 작은 숲이랄 정도로 잘 자랐다. 화분의 이끼도 비 흠뻑 맞고는 제대로 초록빛을 띤다.
방송국의 작업환경은 너무 추워서(기계가 습도 온도에 민감해 갑자기 마이크가 끊어지기도 한다) 사시사철 공조실의 찬 기운이 늘 정수리로 떨어진다. 같이 진행하는 옆지기 젊은 남자도 힘들어한다. 이 더위에 녹아내릴 정도의 일터에서 견디는 분도 계시고 우리 같은 환경도 있어 출근해서 가든스튜디오(여성시대 생방송을 하는 곳) 문을 열면 소름이 돋게 춥다. 찬 공기를 마시니 훌쩍이며 콧물이 나오다가 재채기도 해서 보온병 가득 따뜻한 물은 필수다. 여하튼 여름감기 환자들도 눈에 많이 띈다. 혹시 냉방병을 감기라 하나? (ㅠㅠ, 코로나란다)
맹맹한 목소리로 방송하며 큰 유리 밖 주조정실을 보니 담요를 둘러쓴 젊은이도 보인다. 몸 안의 냉기를 빼내려면 따뜻한 탕 안에서의 목욕이 제일 좋다. 다정한 세신사 언니가 고향 다녀오며 그 지역 특산인 다슬기국을 땡땡 얼려서 가져다주었다. 동네 개울이 맑아 다슬기 잔뜩 잡아 깨끗이 씻어서 집간장 넣고 삶은 다음 둘러앉아 수다 떨며 까면 금세 다 한단다. 삶은 그 물에 부추 잔뜩 넣어 먹으면 그만한 보양식이 없단다. 여름 잘 나라고 응원해주니 참 고맙다. 세상 좋은 선물이다. 요새는 먹을 것을 주는 게 제일 고맙다. 불 앞에서의 번열 나는 것 덜하고 땀도 덜 흘리며 몇끼 때우는 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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