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무지에 대한 반성문 [젠더 프리즘]
박현정 | 젠더팀장
수습기자 명함을 받은 지 3개월쯤 되던 2006년의 일이다. 법조인들이 있던 술자리에선 폭탄주가 돌고 돌았다. 이렇게 마시다 기절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쯤 술자리가 끝났다. 음식점 밖으로 나오던 길, 어질어질 빙빙 돌던 정신이 번쩍 든 건 그날 처음 본 이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던 때였다. 불쾌하고 끈적였던 접촉을 단번에 뿌리치지도, 항의하지도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판검사 출신인 60대 3선 국회의원이 여성 기자를 성추행하곤 “술에 취해 음식점 주인으로 착각해 실수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비공식적 술자리에 꼭 가야만 하는지, 어느 선배에게 물었다.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취재를 위해선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자리엔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기자로서 자질과 능력 부족으로 치부했다. 비공식적 술자리가 많다는 부서를 한동안 지망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기자가 아닌 여성으로 대하는 성적인 언동에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게 됐을 무렵이었다. 취재에 응해준 중년의 남성이 저녁 식사를 거듭 제안했다. 거절이 쉽지 않아 그가 속한 분야를 맡은 기자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동료는, 자신이 자리에 앉자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도 함께 내려앉았다고 전했다. 상대 쪽에선 여성 기자가 나오는 것으로 여긴 것 같다고, 이런 어려움은 미처 알지 못했다고 동료 남성 기자가 말했다.
언론계를 둘러싼 남성 중심적 문화에서 여성 기자로 일했기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질서에 대한 의심과 마이너리티(집단 가운데 수가 적거나 권력이 적은 그룹)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레 쌓였다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번 파리올림픽 복싱 여자 66㎏급 금메달리스트인 알제리의 이만 칼리프(25)를 통해 미처 몰랐던 사실을 마주했다.
칼리프가 16강에서 46초 만에 기권승을 거둔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비난이 쏟아졌다. 불투명한 운영으로 국제기관 지위를 박탈당한 국제복싱협회(IBA)는 지난해 여자세계선수권대회 도중 칼리프를 실격 처리했다. 어떤 검사를 했는지 공개하지 않은 채 그가 XY염색체를 가졌다고 했다. 성염색체가 XY라면 당연히 남성이라는 전제로 ‘여성 경기에서 배제해야 한다’(도널드 트럼프 등)는 공격과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칼리프가 여성으로 나고 자랐으며, 여권에 기재된 성별 역시 여성이라고 밝혔다. 유니세프 알제리 지부도 지난 3월 누리집에 올린 글에서 칼리프를 ‘최고의 여성 복싱선수’라고 소개했다. XY염색체가 있어도 여성일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안드로겐 무감각 증후군이 있는 경우 남성호르몬이 분비되긴 하지만 수용체 기능에 결함이 있어 남성으로 분화·발달되지 않음)을 미리 알았다면 언론 보도는 달라졌을까.
염색체가 생물학적 성별(내·외부 생식기)을 가른다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스스로 인식하는 성별 정체성을 고려해야 비로소 한 사람의 성별이 결정된다는 사실 역시 간과했다. 미국 에이피(AP) 통신에 따르면 자신을 성소수자(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등)라고 밝힌 파리올림픽 출전 선수는 최소 193명이다. 2021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성소수자 선수 규모(최소 186명)보다 많다. 칼리프는 지난 4일 에이피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아랍어로 말했다. “(16강전 이후) 언론 광풍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쳤다. 약자 괴롭힘은 사람을 파괴할 수 있고 생각과 정신을 죽일 수 있으며 사람들을 분열시킬 수 있으므로 모든 선수들에 대한 괴롭힘을 중단해주길 촉구한다.”
전문가들은 언론에 조언한다. 잘 보이지 않는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를 경청하라고. 성차별, 이성애 중심, 인종주의적 편견을 언론이 더 강화하고 있는지 되물으라고. 정신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핑계로 질문을 멈췄던 건 아닌지 다시 물어야 할 때다.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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