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없는' Z세대의 반전 올림픽 … 팀코리아 금빛 세대교체

차창희 기자(charming91@mk.co.kr), 김형주 기자(livebythesun@mk.co.kr), 김지한 기자(hanspo@mk.co.kr) 2024. 8. 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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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파리올림픽은 한국 국민에게 '파리의 기적'으로 남았다. 21개 종목 선수 144명으로 이뤄진 소수 정예로 이 대회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이 당초 목표로 내건 금메달은 단 5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태극 전사들은 기대를 크게 웃도는 금메달 13개를 따냈다. 메달을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들의 반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디어, 코치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선수들이 금빛 레이스에 성공한 건 Z세대(1990년대 중반~2010년대 출생자)로 대표되는 선수 개개인의 특성과 더불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의 조합이 가능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당당·자율 Z세대

프랑스 파리에 상륙한 태극 전사들은 당당하고, 겁이 없었다. "질 자신이 없었다. 내가 어떤 놈인지 보여줄 수 있어 기쁘다"는 펜싱 사브르 대표팀 금메달리스트 도경동(25)의 저돌적인 발언은 Z세대의 넘치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표본이 됐다. 1020세대 어린 선수들로 구성된 팀 코리아는 상대의 세계랭킹이 높든 낮든,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국 금메달리스트의 평균 나이는 24세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탑재한 이들은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실력을 뽐냈다.

금메달 수확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던 10대 어린 선수들의 금맥 캐기 비결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마음가짐이다. 사격 여자 10m 공기권총 금메달리스트인 오예진(19)은 "제가 메달 유력 후보가 아니라고 해도 신경 안 썼다. 그냥 순간을 즐겼다"며 금빛 총성을 울렸다.

여고생 소총수 반효진(16)도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독하게 치고 올라가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꿈의 무대에 임했다. 그가 과거 훈련 중 노트북에 붙인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라는 메모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주목받기도 했다. 세계 랭킹 24위인 태권도 김유진(23)이 객관적 기량에서 앞서는 1·2·4·5위 선수들을 차례로 '도장 깨기'에 성공한 원동력도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이다. 김유진은 "세계 랭킹은 숫자일 뿐"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태권도 박태준(20)의 장점은 어린 나이에도 강한 멘탈이다. 그의 스마트폰엔 '내 운을 확 끌어올리는 행운의 말버릇'이라는 제목의 메모가 담겨 있다. '난 된다' '난 될 수밖에 없다' '난 반드시 해낸다' '이 또한 지나간다' '시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까짓 일로 죽기야 하겠냐' 6개의 문장을 되뇌며 그는 힘을 얻었다.

Z세대 선수들은 악바리 근성도 가지고 있다. 예정된 훈련이 끝나서도 개인이 자율적으로 추가 훈련을 하며 자신을 담금질한다. 양궁 3관왕에 오른 임시현(21)은 매일 500개가 넘는 화살을 쐈다고 한다.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는 종목별로 지켜야 할 규율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지도자는 젊은 선수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줬다.

한 스포츠계 관계자는 "이번 올림픽을 통해 Z세대의 가능성과 에너지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실제 글로벌 무대에서의 성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며 "Z세대는 이제 미래의 주역이 아닌, 현재의 성과 주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혜 없는 공정경쟁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닌 공정한 경쟁 시스템도 한몫했다. 파벌이 아닌 오직 실력에 따라 태극 마크를 부여했다. 파리 무대에서 5개 종목 금메달을 싹쓸이한 세계 최강 양궁의 동력이 바로 공정한 무한 경쟁이다.

실제로 이번 올림픽에서 활시위를 당긴 한국 여자 대표팀 3명 모두 3년 전 도쿄 대회 멤버가 아니다.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에 빛났던 안산도 파리행 비행기엔 탑승하지 못했다. 전직 금메달리스트라고 '특혜'를 주지 않는다.

선발전은 세 번, 평가전은 두 번 진행된다. 한국 양궁 선수들이 올림픽에 나가려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다섯 차례의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 한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보다 한국 양궁 선수로서 태극마크를 다는 게 힘들다"는 얘기마저 나올 정도다.

대회 3관왕을 기록한 김우진(32)도 "국가대표 선발 과정이 공정하기 때문에 모두가 동등하게 경쟁을 펼칠 수 있다는 게 한국 양궁의 힘"이라고 말했다. 한국 양궁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뒤 36년 동안 단 한 번도 금메달을 놓친 적이 없었다. 여자 양궁은 10연패, 남자 양궁은 3연패에 성공했다. 활을 가장 잘 쏘는 선수에게 집중한 선발 방식이, 꿈의 무대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성과를 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국민도 공정 키워드에 대해 공감하는 모습이다. 리얼미터에 따르면, '파리올림픽에서 한국이 스포츠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얻고 있는 원인'에 대해 나온 답변 중 가장 많은 응답(22.9%)이 "투명한 선수 선발 과정"이었다.

VR 훈련 등 시스템 혁신

훈련에 가상현실(VR), 로봇, 다중 카메라 등 첨단 장비를 활용한 것도 좋은 성적의 비결로 꼽힌다.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로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둔 사격 대표팀은 경기력 향상을 위해 최첨단 기술의 도움을 빌렸다. 시뮬레이션 훈련장, VR 세트장에서 선수들이 파리올림픽 사격장을 미리 경험했고, 실전 감각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를 획득한 펜싱 대표팀은 인공지능(AI)을 훈련에 활용했다. AI로 상대의 경기 영상을 분석한 뒤 가상 맞춤 대결을 진행하는 식이다. 도경동 등 국제 대회 경험이 적은 선수들에게 이 AI 훈련은 비밀병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로봇도 유용한 훈련 파트너가 된다. 양궁 대표팀은 과녁에 화살을 날리는 슈팅 로봇을 훈련에 도입했다. 선수들은 바람의 영향 외에 오차 요소가 거의 없는 로봇과 1대1 대결을 벌이면서 실전에 버금가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야외 훈련용 다중 카메라 역시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도왔다. 여러 개의 카메라가 다각도에서 선수를 촬영한 뒤 슈팅 전후 모습을 느린 화면으로 제공해 자세를 정밀하게 분석하게 했다.

올림픽 경기장과 유사한 훈련 환경을 제공한 것 역시 선수들이 실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왔다. 양궁 대표팀은 진천선수촌에 파리 레쟁발리드 양궁 경기장을 구현한 시설에서 훈련을 진행했다.

현대차·SKT 등 기업의 전폭 후원

기업들의 든든한 후방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선수들의 실력과 노력이 불씨였다면 기업들의 후원은 그 불을 활활 태운 산소 역할을 했다.

대한양궁협회 회장사인 현대차그룹은 1985년부터 40년간 대한민국 양궁이 세계 최고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국내 단일 종목 스포츠 단체 후원 중 최장 기간이다.

훈련 장비 기술 지원부터 소음 적응 등을 위한 특별 훈련장 제공, 파리 현지 식사 및 휴게 공간 제공 등까지 전폭적 지원을 했다. 특히 현대차그룹은 지원은 하되 대표팀 선발이나 협회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수십 년째 지키고 있다.

펜싱 대표팀의 뒤에는 SK그룹이 있다. 2003년부터 대한펜싱협회 회장사를 맡은 SK텔레콤은 금전적 지원을 할 뿐 아니라 대표팀 관계자들과 인간적 교류도 하고 있다.

대한펜싱협회 회장인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은 이번 올림픽에서 빼놓지 않고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펜싱 구본길이 "열심히 하면 포상금 두둑이 주시는 거죠?"라고 농담할 정도로 선수들과 친근하다. 현재까지 협회에 지원한 금액은 300억원에 이른다.

재계 관계자는 "팀 코리아를 빛낸 Z세대에게 열심히 하면 포상금 등으로 확실히 보상하는 모습이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SK그룹은 핸드볼도 오랜 기간 지원하고 있다. 학창 시절 핸드볼 선수였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08년 대한핸드볼협회 회장이 된 뒤 2011년 430억원을 투자해 국내 첫 핸드볼 전용 경기장을 기증하는 등 전폭적 지원을 하고 있다. 파리올림픽을 앞두고는 승리 수당을 도입해 선수들의 사기를 높였다.

[차창희 기자 / 김형주 기자 / 김지한 기자 / 박소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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