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 ‘최애’ 소리꾼과 인기 코미디 ‘쓰리랑 부부’ 감초 조상현·신영희 명창의 ‘마지막 빅쇼’
1995년 ‘KBS 빅쇼-조상현·신영희, 소리로 한 세상’ 이후 29년 만에 한 무대
1970∼1990년대 오누이 같은 단짝으로 인기…국내외에 판소리·국악 매력 알린 원조 한류 스타
고 이병철 삼성 회장 “천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소리”…집까지 사줄 만큼 조 명창 아껴
조상현 “소리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생명. 무대는 무서운 곳이라 이제는 제자 양성에 집중”
신영희 “소리는 내 생명이고 인생. 무대에서 소리하다 쓰러져 죽는 게 소원”
판소리 완창 둘 다 부정적…“단 몇 분이라도 예술을 해야지 시간 자랑하는 게 아냐. 관객이 지루해하면 안 돼”
KBS 올 추석특집으로 방영 예정
‘빗소리도 임의 소리 바람소리도 임의 소리/ 아침에 까치가 울어대니 행여 임이 오시려나/ 삼경이면 오시려나 고운 마음으로 고운 임을 기다리건만/ 고운 임은 오지 않고 베갯머리만 적시네’(신영희 ‘흥타령’ 중)
풍류 좀 아는 사람은 한 번쯤 읊어봤거나 들어본 유명 단가 ‘사철가’와 남도민요 ‘흥타령’의 일부다.
하지만 둘이 한 무대에 서는 장면은 거기서 끊겼다. 조 명창이 불미스러운 금품 수수 사건에 연루돼 2004년 벌금형을 선고받고, 2008년 무형문화재 자격까지 잃은 뒤 공식적인 무대에 오르지 않은 것도 작용했다.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이 “천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소리”라고 극찬할 만큼 대단했던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에 안타까워하는 국악인과 귀명창이 적지 않았다.
올해 희소식이 들렸다. 소리 인생만 합쳐서 145년 가까이 되는 두 명창이 2024전주세계소리축제 폐막 무대(8월18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를 장식한다는 것. KBS 빅쇼 이후 29년 만에 선보이는 ‘조상현·신영희의 빅쇼’다.
앞서 지난해 대대적 변신에 나선 전주세계소리축제 측은 ‘국창열전 완창 판소리’를 기획해 조 명창을 공식 무대로 불러냈다. 김일구(‘적벽가’), 김수연(‘수궁가’), 정순임(‘흥보가’), 신영희(‘춘향가’), 조상현(‘심청가’) 다섯 원로 명창이 제자들과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하는 공연이었다. 지난 5일 서초구 자택 인근 카페에서 만난 조 명창은 “(축제 사무국 직원들이) 2009년부터 나를 찾아와 축제 참여를 요청했지만 완강히 거절했다”면서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와 간곡히 설득하더라. 11번째 만났을 때 그 정성에 탄복했다. 십일고초려 끝에 출연한 것”이라며 웃었다.
김희선 전주세계소리축제 집행위원장은 “지난해 축제 당시 신영희 선생님이 ‘예전에 KBS빅쇼를 같이 한 적 있다’고 해서 ‘내년 축제에 그런 무대를 올려보자’고 하니 두 분 모두 ‘좋다’고 했다”며 “이번 공연은 조상현·신영희 명창이 함께 꾸미는 마지막 무대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도 같은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같이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전남 보성 태생인 조 명창은 서편제 시조로 알려진 강산 박유전(1835~1906)의 ‘보성 소리’ 계보를 잇는 정응민(1896∼1964) 명창에게 12살 때부터 배웠다. 20대 중반 상경해 박녹주(1905∼1979) 명창을 양어머니로 모시며 소리 공부에 매진했다. 1970년대 국립창극단 최고 스타였고, 전주대사습놀이 첫 대통령상(1976년) 수상자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심청가) 보유자로 인정됐다.
그의 소리에 푹 빠져 자주 불러 판소리를 청했던 이병철 삼성 회장은 성북구 석관동 집을 사주기도 하는 등 청년 예인을 극진히 챙겼다. 조 명창은 “이병철 회장은 진정으로 우리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존중하는 분이었다”며 일화를 전했다. “1980년대 초 이병철 회장 집에 초대받아 간 적 있다. 내가 지은 ‘사철가’ 가사를 (서예 대가)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쓴 게 벽에 붙어 있는데 길이가 15m나 됐다. 국무총리를 마치고 삼성 쪽에서 일한 신현확과 대기업 회장 등이 모여있는데 갑자기 이 회장이 신현확 전 총리에게 ‘조상현과 임방울 중 누가 소리를 더 잘하느냐’고 묻더라. ‘아직은 임방울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하자 바로 이 회장이 ‘당신은 다음 모임부터 빠져’라고 했다. 놀란 신 전 총리가 다급하게 ‘조 명창도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합니다’ 그러니 이 회장이 ‘이 사람(조상현)은 1000년이 가도 안 나올 수 있다’고 반박했다.”
진도에서 태어난 신 명창은 11살 때 아버지 신치선 명창에게 배우며 판소리에 입문했다. 매일 이른 새벽 목포 유달산에 올라가 소리 연습을 해 ‘유달산 다람쥐’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안기선·장월중선·강도근·박봉술·김상용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목포까지 내려와 자신을 발탁한 마지막 스승 만정 김소희(1917∼1995)의 애제자다. 1977년 남원 춘향제 명창부 대상을 차지했고, 국립창극단과 민간 극단 연극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등 다재다능했다. 국악인 최초로 1986년 제22회 백상예술대상 연기부문 특별상을 받았을 정도. 201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가 됐다.
두 명창은 고령에도 매일 공부하고 소리 연습을 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조 명창은 “노래하는 것과 소리하는 것은 다르다. 노래는 인위적이고 소리는 자연적”이라며 “물소리와 천둥소리, 바람소리처럼 판소리도 자연이다. 자연 그대로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게 소리”라고 강조했다. 신 명창은 “‘재주는 덕의 종이고 덕은 재주의 주인이다’가 예술가로서 나의 좌우명”이라며 “한마디로 잔재주를 부리지 말라는 얘기다. 진정한 소리꾼이 되려면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조 선생 생각에 더해) 판소리 한 바탕을 긴 시간 완창하면 관객이 지루해 한다. 소리꾼 여러명이 같은 바탕을 나눠 불러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갈라쇼처럼 각 바탕의 눈대목(관객들이 들어봄직한 유명 대목)들을 엮어 부르는 게 낫다. 관객이 몰입해 즐길 수 있는 판소리 공연을 하는 게 중요하다.”(신 명창)
당대 최고 소리꾼이자 정재계 등 각계 고위·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 명창은 “판소리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생명이다. 서류상 문화재가 아닐 뿐 내 소리 자체가 문화재”라면서도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100번, 1000번을 서도 무서운 곳이 무대라 아무리 마음이 앞서도 나이를 생각해 참아야 해요. 이젠 긴장 그만하고 제자 양성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지난해 소리축제 때 각자 공연한 곳이 100석 규모에 불과한 전주한옥마을 내 옛 동헌이었다면 이번 빅쇼 공연은 1000석이 넘는 대극장에서 열린다. 두 명창은 ‘심청가’ 일부 눈대목(판소리에서 두드러지는 장면) 등을 들려준다. 영화 ‘서편제’에서 열연한 배우 겸 국악인 오정해 사회로 이들의 소리 여정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마련된다. 아울러 국창들이 치열하게 지켜온 우리 소리를 미래 세대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에서 전북지역 젊은 소리꾼 10명이 같은 무대에 오른다. KBS국악관현악단이 연주로 뒷받침한다. 공연은 올 추석 명절에 KBS특집 프로그램 ‘조상현·신영희의 소리로 한 세상’으로 방영될 예정이다.
글·사진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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