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이자 마지막…명창 조상현·신영희의 ‘빅쇼’

임석규 기자 2024. 8. 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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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전주세계소리축제서 30년 만에 한 무대
단짝으로 활동했던 ‘원조 국악 스타’ 조상현(오른쪽)·신영희 두 명창이 오는 18일 전주세계소리축제 폐막 공연에서 30년 만에 한 무대에 올라 ‘빅쇼’를 펼친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조상현(87) 명창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풍채가 당당하고, 넉살과 능청스러움도 여전하다. 신영희(82) 명창은 요즘도 간간이 무대에 서는 현역 국악인.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에 거침없는 입담이 녹슬지 않았다. 단짝으로 활동했던 ‘원조 국악 스타’ 두 사람이 오는 18일 전주세계소리축제 폐막 공연에서 30년 만에 한 무대에 올라 ‘빅쇼’를 펼친다. 지난 5일과 6일 차례로 만난 두 명창 모두 “이번이 함께 서는 마지막 무대일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20대 초반 전남 목포에서부터 가깝게 지냈다. 조 명창이 1976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대통령상을 받자, 신 명창은 이듬해 남원 춘향제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했다. 국립창극단 배우로 함께 일하며 ‘옹고집전’ ‘허생전’ ‘장화홍련전’ 등에서 호흡을 맞췄다. 1970~80년대 유럽 공연도 함께 다녔는데, ‘심청전’에서 조 명창이 심 봉사, 신 명창이 뺑덕어멈 역을 했다. 방송사들은 재담에도 능한 두 사람을 한자리에 자주 불렀다. 이번 공연에선 1995년 한국방송(KBS) ‘빅쇼’에서 방영한 ‘조상현 & 신영희의 소리로 한세상’을 재현한다.

‘당대 최고의 소리꾼’ 조상현 명창. 임석규 기자

“백번, 천번을 서도 무서운 게 무대예요.” 조 명창은 “대사 한마디도 무섭고 두렵다. 늙어 죽을 때까지 무대 서려는 욕심은 없다”고 했다. 천하를 호령해온 호방한 소리꾼이 무대가 무섭다니, 뜻밖이다. 그는 지난해 전주세계소리축제 무대에 섰는데, 여기엔 ‘십일고초려’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다. 2009년부터 무대에 서줄 것을 10번이나 요청받았으나 완강하게 거절하다가 지난해에야 수락했다. 조 명창은 “11번이나 요청하는데, 거기에 감동했다”며 “전주세계소리축제와는 특별히 맺어진 인연”이라고 했다. “내 마음과 정신에서 우러난 최선을 다할 뿐이죠. 아무리 마음이 앞서도 나이가 있잖아요.”

신 명창은 지난해 9월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춘향가’를 했고, 3개월 뒤엔 국립국악원에서 ‘소리인생 70년’ 기념 공연을 열었다. “무대가 부담스럽긴 해도 소리하다 죽는 게 소원이에요.” 그는 “나이 먹어 자신감이 떨어졌고, 소리를 야들야들하게 못한다”면서도 무대를 지키고 싶어 했다. “세상에 조 선생 같은 소리는 없어요.” 신 명창은 “조 선생하고 같이 무대에 선다니 나름대로 설레고 들뜬다”고 했다.

‘당대 최고의 소리꾼’으로 인정받은 조 명창의 소리 인생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온갖 복록을 다 누려봤어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더니 휴대전화에 저장한 옛날 사진들을 보여줬다.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이병철 삼성 창업주 등 정·재계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끝없이 나온다. “이병철 회장이 ‘1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소리’라고 극찬하며 용인 별장으로 자주 불렀고, (서울) 석관동에 집도 사줬다”니, 그 시절 최고 스타였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국악경연대회에서 금품이 오간 혐의로 2003년 검찰에 기소되고, 2008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 자격까지 반납하면서 공식적인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는 당시 일에 대해 억울함을 나타내면서 “무형문화재를 반납했지만 내 예술은 못 가져간다”고 했다.

장르를 넘나들며 국악의 대중화에 힘쓴 신영희 명창. 임석규 기자

신영희 명창은 장르를 넘나들며 국악의 대중화에 힘썼다. 창극은 물론, 연극 무대에도 자주 올라 ‘특별 연기상’을 받았다. 그가 코미디 프로그램 ‘쓰리랑 부부’에도 출연하겠다고 하자, 스승 김소희(1917~1995) 명창부터 만류했다. “패물을 농에 담아두려고 합니까, 차고 나가려고 합니까. 예술을 우리끼리만 하면 누가 알아주나요.” 신 명창은 “이렇게 설득했더니 스승님도 놓아주시더라”고 떠올렸다. 신 명창이 사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아파트엔 그가 8천만원을 주고 의뢰했다는 큼지막한 만정 김소희 명창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그는 ‘만정제 춘향가’의 맥을 잇고 있다.

조상현(왼쪽)·신영희 명창.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두 명창은 작사와 작창(가사에 소리를 입히는 일)에도 재능을 보였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영화 ‘서편제’(1993)에서 배우 김명곤이 불러 유명해진 단가 ‘사철가’다. 조 명창은 “내가 20대 시절 직접 지어 부른 노래”라고 했다. “살다 살다 못 살면은/ 깊은 산중 들어/ 산고곡심 무인처에~” 신 명창은 “흥타령 4곡조의 가사를 짓고 작창했는데, 이번 공연에서 제자들과 함께 부른다”고 했다.

젊은 시절 중앙아시아 공연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조상현(왼쪽)·신영희 명창. 두 사람은 20대부터 가깝게 지냈고, 국립창극단 배우로도 함께 활동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일세를 풍미한 두 명창 모두 판소리 완창에 부정적인 대목도 흥미롭다. “5시간 완창한다고 다 명창이 되나요. 옛날 명창 중에 한명도 완창하신 분이 없어요.”(조상현) “소리의 본질을 깊이 깨우치지 않은 채 달달 외워 긴 시간 완창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신영희) 1968년 9월30일, 박동진(1916~2003) 명창이 5시간 동안 ‘흥보가’를 완창한 게 최초의 판소리 완창 기록이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해요. 남이 10시간 할 때, 천번, 만번 해야 하는 게 소리입니다.”(조상현) “‘재주는 덕의 종, 덕은 재주의 주인’이 제 좌우명입니다. 잔재주 부리지 말고 살라는 뜻이죠.”(신영희) 두 명창의 소리 철학도 묘하게 닮았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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