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최전선에 서 있던 ‘뒷것’ 김민기

한겨레 2024. 8. 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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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ㅣ‘뒷것’ 김민기를 기리며
강헌 음악평론가
김민기 학전 대표의 생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김민기는 전쟁 유복자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인민군에게 학살된 아버지는 세상에 없었다. 전쟁의 비극과 전후의 절대적 빈곤, 그리고 4·19와 5·16,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대를 거치며 그는 미술학도가 되었다. 가족으로서의 아버지도 없었지만 음악 예술가로서의 아버지도 없었다. 그는 해방 후 날 때부터 한글을 익힌 거의 첫 한글세대였고, 그에게 부여된 유산은 식민지 시대의 일본 문화와 전쟁 후 쏟아져 들어온 미군 부대의 문화였다.

김민기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아니 모든 것을 원점에서부터 출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197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진정한 정신이었다. 1971년 가을 발표된 그의 데뷔 앨범의 재킷은 단정하고 단호한 그의 기백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는 한국대중음악사상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앨범의 영예를 가지게 된 이 음반을 통해 모국어의 아름다운 울림과 고단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현실 풍경에 주목했고, 이와 같은 그의 미학관은 50년이 더 흐르도록 변함이 없었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며 더욱이 저항가수로 자처한 적도 없지만 제3공화국과 특히 제4공화국 유신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의 생각과 태도는 불온한 것이 되고 만다. 고작 스물한살의 나이에 그는 ‘금지’되었다. 자신의 앨범을 발표했음에도 스스로 ‘나는 양희은의 기타 반주자’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어둠 속의 신화가 되기 시작한다.

금지의 폭력 앞에 사라져버린 그의 데뷔 앨범만으로도 한국대중음악사는 영원히 그의 이름을 비켜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화는 단순히 정치적 탄압의 반사작용이 아니었다. 그는 공장과 농촌, 군대와 탄광의 노동을 통해 삶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그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후의 인터뷰에서 그저 먹고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애써 의미를 희석시켰지만 그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도 순진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처절한 시간 속에서 미대 대학생으로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진정한 그의 노래 정신이 빛나는 숱한 명곡들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아침 이슬’과 ‘길’이 대학 초년생 시절의 그의 내면을 대표한다면, 기나긴 노동의 시간 동안 만든 ‘상록수’ ‘강변에서’ ‘기지촌’ ‘늙은 군인의 노래’ 같은 빛나는 명작들이 그 노동 현실 속에서 제련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대 후반의 김민기가 보여준 처절한 전복의 상상력은 지하에서 제작한 일종의 노동자 노래극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다. 총 20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이 노래극은 경제개발의 구호 뒤에서 무너지는 참혹한 노동의 현실을 서사적으로 담은, 대중음악사를 넘어 한국 문화사 전체로 보더라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서울 원효로의 송창식 개인 스튜디오 등에서 비밀리에 녹음하여 불법적으로 제작한 이 카세트테이프는 그 이후 열리게 될 80년대 노래운동의 기원이 되었으며, 또한 30대 이후 약 40여년에 이르는 소극장 뮤지컬의 연출자라는 새로운 도전의 첫 출발점이 된다.(이 대목에서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지위를 단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던 송창식의 대범한 도움은 꼭 짚고 넘어가자.)

강헌 음악평론가. 한겨레 자료사진

‘지하철 1호선’을 시작으로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의 책임자로서 마지막 33년을 보낸 김민기의 삶은 한순간도 풍요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시대와 현실이 예술가로서의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를 언제나 고수했다. 그 자리는 또한 언제나 최전선이었다.

40여년 전 조영남은 ‘김군에 관한 추억’이라는 김민기에게 헌사하는 노래에서 이렇게 불렀다. “너의 기타 치던 솜씨는 일류였지/ 너의 노래 속엔 뜻이 있었지/ 단지 노래를 불러 출세하기가 너무도 쑥스러워/ 말없이 가곤 소식 없는 친구여”

김민기는 화가를 꿈꾸었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가수로서 음반을 발표했지만 1972년 이후 거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지난 50년의 시간 동안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사랑 타령이 아닌 삶의 노래를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권력자들은 노래를 감시한다. 시인 박재삼의 말대로 ‘이야기는 거짓이지만 노래는 참말’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는 참말이다. 그의 노래가 참말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삶이 참삶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를 살아온 것이 자랑스럽고 부끄럽다.

강헌/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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