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소송기한 ‘깜빡’…법무법인은 폐업 [주말엔]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국가는 도로나 댐 등을 조성하는 여러 공익사업을 시행합니다. 이러한 사업에는 토지가 필요하겠죠. 공익사업 용지로 쓰기 위해 원래의 땅 주인에게 일정한 보상을 해주는 대신 국가가 땅 소유권을 강제로 가져오는 제도가 바로 수용제도인데요.
땅 주인이 생각하는 토지 가치와, 나라가 땅 주인에게 보상해주겠다는 금액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땅 주인은 이 경우 곧바로 소송을 내야 합니다. 일정한 기간을 넘기면 나라에서 정해준 땅값을 받고 소유권을 넘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땅 주인의 소송을 대리해주기로 한 법무법인이 기간을 넘겨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보상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땅 주인은 얼마나 손해를 배상받을 수 있을까요? 만약 그 법무법인이 폐업해 버렸다면, 누구에게서 배상을 받아야 할까요.
■ "토지 수용 다퉈달라" 법무법인 선임했지만
하남시 인근에 토지를 갖고 있던 A 씨.
2016년 국토교통부는 세종~포천 고속도로 개발을 발표하고 도로구역을 고시했는데, A 씨 등 4명이 보유한 토지들은 10공구부터 14공구의 구간에 포함돼 수용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토지 보상금을 두고 국가와 마찰이 생기자, A 씨 등은 2018년 도로구역 안에 위치한 토지와 지장물 등 땅값을 더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며 B 법무법인과 소송 위임 계약을 맺었습니다.
착수금은 없고, 성공보수금은 행정소송에서 보상금이 증액되는 금액의 10%를 받기로 하는 계약이었습니다. 당시 담당 변호사는 C 씨였습니다.
B 법무법인은 2018년 5월 사업시행자인 한국도로공사에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토지보상법)에 따른 재결을 신청했습니다.
행정심판을 하는 중앙토지수용위원회는 양자간 협의가 성립되지 않자 2019년 1월 정해진 돈을 받고 국가에 토지를 넘기라며 '수용 재결'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법령상으로는 수용재결 서류를 받은 날로부터 60일 안에 행정소송을 내야 국가의 토지 수용을 추가로 다툴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안에 소송을 내지 않으면 행정심판 결과를 받아들인 것으로 간주돼 이후 소송을 내도 패소하게 되는 겁니다.
구 토지보상법 제85조 제1항
사업시행자, 토지 소유자 또는 관계인은 제34조에 따른 재결에 불복할 때에는 재결서를 받은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B 법무법인 소속 직원이 수용 재결 서류를 받은 건 그해 1월 16일.
하지만 B 법무법인은 2019년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행정법원에 보상금을 더 달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당시 담당변호사는 C 씨를 비롯해 4명의 변호사가 지정됐습니다.
A 씨 등의 소송은 당시 토지보상법에 따라 60일의 소송 제기 기간을 이미 넘긴 상황에서 제기됐다는 이유로 본안 판단 없이 각하되거나, 청구 포기·취하 등으로 매듭지어졌고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땅 주인 A 씨 등의 입장에서는 보상금을 더 이상 다툴 방법이 없어진 겁니다.
■ "변호사가 소송기한 넘긴 건 불법행위"…법무법인은 폐업
A 씨 등은 2021년 B 법무법인과 당시 소송을 담당했던 변호사 4명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A 씨 등은 "법무법인이 소송 대리인으로서 수용 재결서를 받았음에도 제소기간을 넘겨 소송을 냈고, 원고들이 재산권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게 만들었다"면서 "이는 불법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B 법무법인과 담당 변호사로 이름을 올린 변호사 4명을 상대로, 정상적인 소송이 진행돼 승소했을 경우 받을 수 있었던 보상금과 실제로 자신들이 받은 보상금의 차이만큼 배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B 법무법인은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소송을 낸 직후인 2019년 4월 16일 해산을 결정했고, 2020년 5월 19일 청산 종결 등기까지 마쳐진 상태였습니다.
제소 기간 도과로 패소할 것을 예측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드는 대목입니다.
■ 1심 "변호사 등 2명 5억 9천여만 원 배상"
서울중앙지법은 "변호사가 제소 기간을 놓쳐 의뢰인이 패소하게 만든 행위는 불법행위"라며 B 법무법인과 변호사 2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A 씨 등 4명에게 총 5억 9천여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변호사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진 법률가로서 법률 지식과 경험을 충분히 활용하여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 의무를 다하여 의뢰인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어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할 의무를 부담한다"면서 "사무장 등 이행보조자를 사용할 수 있지만, 이용 보조자의 과실은 바로 변호사의 과실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B 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이자 담당 변호사인 C 씨는 의뢰인인 원고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사건 진행 과정에 따라 필요한 절차적인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음에도 이행보조자인 행정직원이 재결서 수령일로부터 60일이 지난 후에야 소송을 내, 원고들이 보상금 액수를 소송으로 다툴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도록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소 기간 미준수는 중대한 과실로서 소송대리행위의 내용 및 대리업무의 공익성, 전문성 등에 비춰볼 때 불법행위"라고 덧붙였습니다.
법원은 대표변호사인 C 씨뿐만 아니라 당시 B 법무법인의 구성원 변호사였던 D 씨도 변호사법과 상법에 따라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함께 진다고 판시했습니다.
재판부는 "D 변호사는 제소 기간이 지날 때까지 소송을 내지 않아 불법행위가 성립한 시점, 즉 피고 법무법인의 원고들에 대한 불법행위 당시 구성원 변호사였고, B 법무법인이 이미 해산해 청산종결등기까지 마친 이상 법무법인의 재산으로 원고들에 대한 채무를 갚을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법무법인과 연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변호사법 제58조
① 법무법인에 관하여 이 법에 정한 것 외에는 상법 중 합명회사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상법 제 210조
회사를 대표하는 사원이 그 업무 집행으로 인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는 회사는 그 사원과 연대하여 배상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피고가 된 다른 변호사들에 대해서는 위임계약 이전에 법무법인을 탈퇴했거나, A 씨 재판이 제소 기간을 넘긴 시점에 업무를 담당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 C 씨 등은 2018년 12월 31일 토지보상법이 개정돼 제소 기간이 90일로 늘어났다며 착각했다는 취지로 선처를 구했지만, 재판부는 개정 법률안의 시행일은 2019년 7월이었다며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법원 "당사자도 스스로 관심 가져야…변호사 책임 70% 제한"
재판부는 그러나 원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변호사들의 책임을 제한했습니다.
재판부는 "행정소송에서 보상금이 증액될 경우 증액된 부분의 10% 상당은 지출되었어야 할 부분"이라며, "A 씨 등이 보상금 관련 소송의 당사자로서 법무법인에 소송 대리를 위임했다고 하더라도 그 진행 상황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였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변호사들의 배상 책임을 70%로 제한한다"며, A 씨 등이 실제 받은 보상금과 토지감정액의 차이는 약 8억 4천여만 원이었지만 5억 9천여만 원만 배상하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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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성 기자 (isbae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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