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떼먹은 전남친, 자기 ‘스폰’에게 전여친 데려가더니…“얘가 딱하니깐 돈 좀 주세요”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8. 11.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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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30] 영화 ‘멋진 하루’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선 타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그를 평가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인종, 성별, 나이, 재산 같은 것이 그렇다.

반면, 그 사람의 도덕성을 이유로 무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빈번히 허용된다. 도덕성이란 것은 공공의 이익과 직결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멋진 하루’(2008)에서 희수(전도연)가 옛 연인 병운(하정우)을 깔보는 이유도 도덕성에 있다. 바로 병운은 1년 전 희수의 돈 350만원을 빌려 갚지 않고 잠수한 전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여자들과 성적으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금전적 이득을 취해 생계를 유지하는 듯하다. 한때나마 그를 좋아했던 과거의 연인으로선 충분히 무시할 만한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질문한다. 남들에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구석이 충분한 사람은 하대받아도 괜찮은가. 그를 하대하는 것은 당신의 인생엔 도움이 될까.

희수는 병운과 계획에 없었던 동행을 하게 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돈 돌려주겠다더니, 온종일 여자들 만나게 해 “얘 사정이 딱해요”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희수(전도연)는 옛 연인 병운(하정우)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찾아간다. 둘이 재회하는 공간이 경마장이라는 건 병운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병운은 여자친구에게 갚을 돈이 없어서 1년이나 연락을 끊었던 주제에 경마장은 뻔질나게 드나드는 한량이었던 것이다.

병운은 적당히 계좌번호나 적어줘서 돌려보내려 들지만, 희수의 의지는 단단하다. ‘오늘’ 받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겠단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병운의 이야기는 정황상 거짓은 아닌 듯하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기 명의의 계좌로 입금받지도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그래서 병운은 제안한다. 자기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고 그 자금으로 채무를 상환할 테니 못 믿겠으면 따라오라고 말이다.

“못 믿겠으면 따라오라”는 병운의 제안을 희수는 받아들인다. 이날만큼은 반드시 돈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술집 여자 주제에 고상한 척하지 마”
하지만 병운이 희수를 데리고 다니며 만나게 하는 사람들은 그녀 입장에선 하나 같이 못마땅하게 느껴진다. 처음 만난 사람은 사업가 여성인데 병운과의 관계가 의심스럽다.

둘 사이에 오가는 여러 대화를 봤을 때, 병운의 성적 매력 때문에 그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주는 ‘스폰’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저 사람이 부탁하면 잠도 잘 수 있느냐”는 희수의 질문에 병운은 그럴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병운은 희수가 돈이 급해 자신을 통해 100만원을 빌리는 것처럼 해서 사업가 여성에게 돈을 받아낸다. 사업가는 희수를 딱한 사람처럼 보며 돈을 내주는데, 희수는 젊은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그 여성이 자기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당장은 희수도 350만원이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병운의 설정에 동참한다.

사업가 여성은 아마도 병운과 성적으로 아슬아슬한 선에 걸쳐 있는 관계를 맺는 듯하다. 병운에게 그 대가로 금전적 필요를 채워준 것으로 추측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다음으로는 유흥가 여성 세미를 만난다. 세미는 희수가 1년만에 전남친을 찾아와서 돈 달라고 하는 것을 두고 비아냥댄다. 1년이나 기다려줬으면 좀 더 참아줄 것이지 왜 갑자기 독촉해서 병운을 비참하게 하냐는 것이다. 계속해서 세미가 “갑자기 갚으라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냐”며 “왜 사람을 저 지경으로 초라하게 만드냐”라고 비꼬자 희수는 발끈한다.

“너처럼 돈 쉽게 버는 애들한테는 350만원이 별거 아닌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술집 여자 주제에 고상한 척 좀 하지 마”

그러나 이것은 앞선 상대방의 공격에 비해 너무 강한 반격이었고, 사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병운은 자기 잘못이라며 무릎을 꿇는다. 여기서 세미가 “미안해요 언니”라고 사과하며 희수는 맘 속으로 후회하게 된다. 자기의 밑바닥을 본 것 같아서다. 수가 틀리면 상대방의 신분을 가지고 모욕할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유흥가 여성 세미는 희수의 신경을 긁는다. 희수는 “술집 여자 주제에”라는 말로 되갚고, 곧장 후회하게 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한심한 인생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채권자인 희수는 이처럼 온종일 전남친과 동행하며 다른 여성들에게 돈을 빌리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어쩌면 그건 ‘끔찍한 하루’일지 모른다. 그러나 희수에게 어쨌든 이날은 ‘멋진 하루’로 기억됐다.

그건 남의 삶을 쉽게 판단하던 희수가 병운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병운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스폰’ 같아 보이는 사업가도, 화류계 여성 세미도 정죄하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 350만원을 못 갚는 삶을 살게 되는 동안, 그들에게도 그런 인생을 살게 된 원리가 있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희수가 병운을 찾아갔을 때, 그는 경마장에 있었다. 희수로서는 확실히 분노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병운과 동행하는 동안 희수는 생각지 못했던 위로를 받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물론 오랜만에 찾아온 희수도 판단하지 않는다. 병운에게 도망갈 의지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희수가 내내 퍼붓는 공격은 과도하리만큼 날 서 있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병운이 그녀의 날카로운 모습까지 그저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희수는 온종일 ‘무책임해 보이는’ 병운의 삶을 따라가는 동안 깨닫게 된다. ‘한심한’ 인생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부모에게서 보호받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자기 삶을 사회생활의 궤도에 올리게 되면 일정한 패턴이 생기게 된다. 그 패턴을 반복하지 않으면 삶이 돌아가지 않는 특수한 구동 원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이 보기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인생을 작동하게 하는 핵심 동력인 경우가 많다.

희수가 병운이 경마장에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았다는 점을 두고볼 때, 아마 앞선 1년 동안에도 충분히 병운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그녀는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렇기에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을 비난하고 깔보는 건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왜냐면 그가 그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를 하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건 그 사람 인생이 밑바닥이라는 게 아니라 나의 세계관일 뿐이다. 내가 남의 어떤 면모를 무시하는지 밝혀질 뿐이다.

희수는 타인을 무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성향이 있다. 병운은 희수의 그런 방어기제까지 이해한다. 희수는 자기 존재의 모난 부분까지 용납되는 경험을 한다.

지하철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인상적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무책임한 전남친 따라다니다가 울고 말았다
희수는 병운과 동행하던 와중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건 병운이 얼마나 착한 인간인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하고 성실하게 살고자 했지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인생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병운에게 350만원을 받겠다고 집을 나서게 되기 직전까지 그녀의 인생도 아마도 이와 유사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기대하지 못했던 위안이 가득한 작품이다. 특히, 화면 곳곳으로 따스하게 스며드는 도시의 햇살이 인상적이다. 햇빛은 희수와 병운이 폐업한 맛집 앞에서 발길을 돌릴 때도,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피해 지하철을 탔을 때도 두 사람을 감싼다. 악다구니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멋진 하루’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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