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떼먹은 전남친, 자기 ‘스폰’에게 전여친 데려가더니…“얘가 딱하니깐 돈 좀 주세요” [씨네프레소]
[씨네프레소-130] 영화 ‘멋진 하루’
현대사회에선 타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그를 평가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인종, 성별, 나이, 재산 같은 것이 그렇다.
반면, 그 사람의 도덕성을 이유로 무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빈번히 허용된다. 도덕성이란 것은 공공의 이익과 직결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멋진 하루’(2008)에서 희수(전도연)가 옛 연인 병운(하정우)을 깔보는 이유도 도덕성에 있다. 바로 병운은 1년 전 희수의 돈 350만원을 빌려 갚지 않고 잠수한 전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여자들과 성적으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금전적 이득을 취해 생계를 유지하는 듯하다. 한때나마 그를 좋아했던 과거의 연인으로선 충분히 무시할 만한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질문한다. 남들에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구석이 충분한 사람은 하대받아도 괜찮은가. 그를 하대하는 것은 당신의 인생엔 도움이 될까.
병운은 적당히 계좌번호나 적어줘서 돌려보내려 들지만, 희수의 의지는 단단하다. ‘오늘’ 받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겠단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병운의 이야기는 정황상 거짓은 아닌 듯하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기 명의의 계좌로 입금받지도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그래서 병운은 제안한다. 자기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고 그 자금으로 채무를 상환할 테니 못 믿겠으면 따라오라고 말이다.
둘 사이에 오가는 여러 대화를 봤을 때, 병운의 성적 매력 때문에 그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주는 ‘스폰’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저 사람이 부탁하면 잠도 잘 수 있느냐”는 희수의 질문에 병운은 그럴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병운은 희수가 돈이 급해 자신을 통해 100만원을 빌리는 것처럼 해서 사업가 여성에게 돈을 받아낸다. 사업가는 희수를 딱한 사람처럼 보며 돈을 내주는데, 희수는 젊은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그 여성이 자기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당장은 희수도 350만원이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병운의 설정에 동참한다.
“너처럼 돈 쉽게 버는 애들한테는 350만원이 별거 아닌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술집 여자 주제에 고상한 척 좀 하지 마”
그러나 이것은 앞선 상대방의 공격에 비해 너무 강한 반격이었고, 사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병운은 자기 잘못이라며 무릎을 꿇는다. 여기서 세미가 “미안해요 언니”라고 사과하며 희수는 맘 속으로 후회하게 된다. 자기의 밑바닥을 본 것 같아서다. 수가 틀리면 상대방의 신분을 가지고 모욕할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그건 남의 삶을 쉽게 판단하던 희수가 병운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병운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스폰’ 같아 보이는 사업가도, 화류계 여성 세미도 정죄하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 350만원을 못 갚는 삶을 살게 되는 동안, 그들에게도 그런 인생을 살게 된 원리가 있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희수는 온종일 ‘무책임해 보이는’ 병운의 삶을 따라가는 동안 깨닫게 된다. ‘한심한’ 인생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부모에게서 보호받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자기 삶을 사회생활의 궤도에 올리게 되면 일정한 패턴이 생기게 된다. 그 패턴을 반복하지 않으면 삶이 돌아가지 않는 특수한 구동 원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이 보기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인생을 작동하게 하는 핵심 동력인 경우가 많다.
희수는 타인을 무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성향이 있다. 병운은 희수의 그런 방어기제까지 이해한다. 희수는 자기 존재의 모난 부분까지 용납되는 경험을 한다.
기대하지 못했던 위안이 가득한 작품이다. 특히, 화면 곳곳으로 따스하게 스며드는 도시의 햇살이 인상적이다. 햇빛은 희수와 병운이 폐업한 맛집 앞에서 발길을 돌릴 때도,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피해 지하철을 탔을 때도 두 사람을 감싼다. 악다구니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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