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대사관인가...잡초 무성하고 불 꺼진 베를린北대사관
부란덴부르크 개선문 주변 번화가에 황량한 모습
대사 대리가 반바지 차림으로 이삿짐 옮기기도
2020년 호스텔 영업중단 판결이후 운영 어려워져
지난 5일 찾아간 독일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은 황량한 분위기였습니다. 주독 북한대사관은 베를린의 번화가인 부란덴부르크 개선문 주변의 글린카슈트라세(Glinkastraße) 5-7 번지에 위치해 있는데, 유독 이곳만 삭막한 풍경이었습니다.
5층, 6층 규모의 두 개 건물과 소형 운동장, 농구장까지 있는 대형 콤플렉스지만 어느 방도 불이 켜 있지 않았습니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원도 없었고, 현관 앞에는 잡초가 가득했습니다. 대사관 앞 인도에도 잡초가 여기저기 피어있어 베를린시도 이곳을 잘 관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침 대형 트럭이 들어와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이삿짐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대사 대리인 김철준 참사관을 포함한 남녀 3명이 이삿짐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김 대사 대리는 평일 근무시간인데도 반바지 트레이닝복 차림인 것이 특이했습니다. 이에 대해 베를린의 외교 소식통은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대부분 귀국했는데, 아마도 남아 있던 짐들을 보내려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유럽의 북한 거점 공관인 주독 북한 대사관에는 현재 최소 인원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23년 박남영 대사가 귀국 후, 후임이 아직 부임하지 않는 가운데 김철준 대사 대리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현지 외교 소식통들은 “신임 대사가 정해졌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으나 언제 부임할 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포탄 등의 군수품을 지원하고, 독일은 최근 유엔사에 가입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좋지 않아 대사 부임이 더 늦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옵니다.
독일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Bild)에 따르면 주독 북한대사관은 지난 4월 15일 김일성 전 주석의 생일 축하 리셉션을 개최했습니다. 호스트는 대사 대리인 김철준 참사관이었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볼프강 노박 의원, 독일 공산당 대표인 토르스텐 쇠비츠 의원과 양국간 경제협회 임원 등 소수의 인사가 초청받았다고 합니다.
◇ 유엔 대북 제재로 호스텔 영업 중단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이 황량하게 된 것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20년 1월 독일 베를린 행정법원은 북한 대사관 건물을 빌려 영업 중이던 ‘시티 호스텔’에 대해 영업 중단 판결을 내렸습니다. 법원은 호스텔 수익이 북한으로 유입돼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시티 호스텔 측은 2017년부터 임차료를 지불하지 않아 대북제재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습니다.
이 호스텔은 2007년부터 운영됐는데, 2016년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발동된 유엔 안보리 결의 2321호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대북결의 2321호는 “북한 소유 해외공관이 외교 또는 영사 활동 이외 목적에 사용되는 것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북한 대사관을 빌려 호스텔영업을 하던 튀르키예 회사 EGI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결국 영업 중단 판결이 나온 겁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외화벌이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차단됐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 상태로 송환된 뒤 사망한 미국인 오토 웜비어의 부모는 “전 세계에 숨겨진 북한 자산을 찾아내 책임을 묻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며 주독일 북한 대사관 부지의 호스텔을 지목한 바 있습니다. 북한은 호스텔 영업이 중단되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확산되자 대사관을 축소 운영했는데 아직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쇠락하는 베를린 북한 대사관
주독일 북한 대사관은 북한의 대유럽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입니다. 냉전시대인 1954년 설치된 주독일 북한 대사관은 동서독 통일 전에는 동독은 물론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를 상대로 한 외교 전초기지로 활용됐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84년 5월 특별 열차를 타고 약 50일간 소련,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8개국을 순방했는데 이때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이었습니다.
거점공관으로서의 이같은 역할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독일과 북한이 2001년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유럽 국가들과 정치적 대화 뿐 아니라 경제, 문화 교류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북한은 주독일 북한 대사관 일부를 호스텔로 활용, 여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대사관을 운용하고 다른 공관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에서 유엔 안보리 결의를 무시하고 핵,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다가 호스텔 영업이 중단되면서 유럽의 거점공관마저 황량한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효과가 없다며 ‘제재 무용론’을 펼치는데, 주독일 북한 대사관의 삭막한 모습은 이에 대한 반증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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