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마주친 염소를 살리고 싶다면 [임보 일기]
수의사에게 ‘젖먹이 고양이를 길에서 주워왔다’라는 지인의 전화는 낯설지 않다. 2024년 한국에서는 동물을 ‘구조’하는 일에 제법 많은 사람이 뛰어드는 것 같다. 적어도 위험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동물을 일단 데려오는 것이 ‘좋은 일’로 여겨지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7월은 야생동물구조센터에 어린 야생동물이 넘쳐난다. 길고양이 새끼가 넘쳐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는 고양이를 받지 않는다. 야생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어린 고양이를 줍는다면, 고양이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동물보호센터로 보내진다. 그럼에도 ‘냥줍했다’는 말에 마냥 칭찬만 할 수는 없다. 나는 ‘냥줍’했다는 지인에게 “네? 어떡하시려고요?”라고 되물었다. 그 지인의 집에는 이미 고양이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인간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맥락은 서로 다르다. 사람마다 가엾게 여기는 동물도 다르다. 심지어 인간이 인지하는 동물의 위험과 실제로 동물이 처한 위험도 서로 다르다. 동물에게 정말 도움이 필요한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그럴 틈이 없다.
얼마 전에는 ‘개 도살장처럼 생긴 곳에 묶여 있는 염소를 데려다주면 돌봐줄 수 있느냐’라는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동물을 도와야 한다고 느끼게 되는 상황은 무엇으로 구성되는 걸까? 지인이 보내온 영상 속에는 흰 염소와 검은 염소 서너 마리가 아마도 여름에만 가동하는 듯한 불법 도살장 앞에 개 몇 마리와 함께 묶여 있었다. 알 수 없는 기계 소리가 뜨겁게 달궈진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염소는 더워서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분명히 제 다리로 서 있었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물어야 할 정도였다. 아마도 며칠 안으로 도살될 게 분명했다. 지인은 눈이 마주친 염소들이 도살되지 않고 잘 살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내 조언은 간단했다. “눈이 마주친 염소를 살리고 싶으면 염소 값을 주고 사오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평생 살 공간과 돌볼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그는 적극적일 뿐 아니라 염소 값을 치를 정도의 돈을 가진 사람이었다. 심지어 누군가 평생 돌봐준다면 염소를 돌보는 데에 드는 비용도 치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 후에 다시 또 다른 염소를 도살용으로 들여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계속 신고하면 그곳이 불법 시설이므로 다시 도살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염소라는 동물은 대개 젖을 짜거나 사람이 잡아먹기 위해 기르는데 모두를 구조할 순 없지 않겠느냐고 또 물었지만, 그는 이미 눈을 마주친 염소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우리는 동물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까? 염소를 구조하고 싶다고 전화를 건 사람은 구조된 염소가 살아야 할 모델로 ‘방목하는 염소’를 제시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가끔 도시인의 눈에 띄는 장면이다. 언덕배기에 흑염소 몇이 허술한 끈을 목에 걸고 풀을 뜯는 장면. 직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삶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이 잘 살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장면 아래에는 동물이 주체로서 경험하는 삶이 있다. 멀리서 보기에 염소가 풀을 뜯는 장면은 평화롭지만, 염소는 진드기에 물어뜯기며 질 낮은 먹이에 고통스러워하는 중일 수도 있다.
우리가 동물을 아끼는 마음으로 동물에게 무언가 행동할 때, 우리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찰나에 일어나는 인간의 연민과 동정과 결심은 동물의 삶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동물에게 그토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도 될까. 아니 그보다도 구조와 그 이후의 행동이 동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하는 것이 더 의미 있어 보인다. 고양이와 염소는 포유류인 가축종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들의 거리는 나와 내 고양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아끼는 마음은 언제나 구체적이어야 한다.
최태규 (수의사·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활동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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