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오늘도 노인들은 지하철을 탄다…"폭염을 피하고 싶어서"

황지향 2024. 8. 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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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석은 비어도 노약자석은 항상 만석
“노후 빈곤에 더위 피할 곳 지하철 밖에"

9일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7월 한 달 동안 65세 노인이 서울 지하철 1~8호선을 승차한 건수는 1797만8111건으로 2022년 같은 기간(1702만6147건)보다 약 95만 건 늘었다. 사진과 기사는 무관함 /더팩트 DB

[더팩트ㅣ황지향 기자] # 경기 의정부에 사는 70대 박모 씨는 지난 9일 오전 10시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중절모로 해를 피해 보려 했지만 얼굴엔 어느새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윽고 인천행 열차가 도착하자 박 씨는 노약자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쪽 귀에 이어폰까지 꽂은 그의 얼굴에는 이내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전국에 폭염특보가 발효되는 등 무더위가 지속되자 피할 곳 없는 노인들이 지하철로 향하고 있다. 뚜렷한 행선지도 없지만 최고 체감온도 35도를 넘는 더위를 피하기에는 지하철만큼 편한 곳이 없다.

체감온도가 37도까지 치솟은 지난 8일 오전 10시 지하철 3호선 오금행 열차는 출근시간이 지나선지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모든 칸의 일반석은 빈자리가 곳곳에 보였다.

반면 노약자석은 달랐다. 60~70대들이 빈자리 없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같은 시간 2호선 성수(외선)행 열차도 여유있는 일반석과 달리 노약자석은 자리 싸움이 치열했다. 10칸 중 8칸이 만석이었다.

경복궁역 개찰구 부근에서 빵을 파는 한 상인은 "여름철에 외국인만큼 노인 이용객이 많아지는 것 같다"며 "혼자 이용하는 사람, 여럿이 이용하는 사람 가릴 것 없이 확실히 많다"고 말했다.

박 씨도 매일 오전 10시면 집을 나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 더위를 피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열차에 타기 위해서다. 정해진 행선지도 없지만 열차에 몸을 맡기면 2시간은 피서지가 따로 없다.

다음 날인 지난 9일 오후 2시 지하철 3·6호선 불광역에도 무더위를 피해 모인 60~70대가 눈에 띄었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던 김무환(79) 씨에게도 지하철은 피서지다. 김 씨는 "여름이면 지하철에서 잠도 좀 자고 시간을 보낸다"며 "집에서 나오면 곧장 지하철행"이라고 말했다.

김 씨 외에도 불광역 의자에는 머리가 희끗한 6명이 제각각 앉아서 쉬고 있었다. 각자 부채질을 하거나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역 한쪽에 있는 콘센트를 이용해 휴대전화 배터리를 충전하는 이도 있었다. 1시간 가까이 충전용 선이 꽂힌 휴대전화를 웃으며 들여다보던 한 남성은 "열차만큼 시원하지 않은 역사도 가장 더운 시간에 있기에 부담 없고 편하다"고 전했다.

지난 8일 서울 지하철 3·6호선 불광역 개찰구 부근 의자에 노인 4명이 앉아서 쉬고 있다. /황지향 기자

여름철 온열질환에 취약한 노인은 외부활동이 어려워 더욱 지하철을 찾는다. 질병관리청은 "노인은 땀샘 감소로 땀 배출이 적어지고 체온조절 기능이 약해 온열질환에 취약하다"며 "폭염특보가 있는 날은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시원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당부했다.

공덕역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환승을 위해 수없이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의자 2개에 4명의 노인이 열을 식히며 앉아 있었다. 역 인근에서 나눠준 전단지를 꾸깃꾸깃하게 접어 연신 부채질하는 노인 옆에는 편의점에서 막 사 온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이도 있었다.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이 큰 한숨을 쉬며 땀을 닦아낸 A 씨는 "역 부근에 살고 있지만 양산과 토시도 무더위에는 역부족이라며 잠시 쉬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너무 더워 힘들 때면 순환 열차인 6호선을 타고 한 바퀴 돌며 쉬고 온다"며 "시원하고 좋다"고 했다. 이어 "외출 후 집에 들어가면 숨이 막혀 에어컨은 딱 30분만 틀고 끈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민단체 노년유니온 고현종 사무처장은 노인들의 지하철 이용을 두고 "노후에 소득이 없어 일어나는 현상"이라며 "대부분 기초연금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노인들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소득이 없어 더위를 그런 식으로 피하게 하고 시간을 보내게끔 하는 게 맞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며 "노인 1000만 시대에 노년기의 여생을 좀 더 활기차게 보낼 수 있도록 국가와 지역사회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hyang@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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