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양궁 신화 쓴 ‘그곳’에서…죽은 나폴레옹과 산 히틀러가 만나다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4. 8. 1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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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65][오-리저널08] 앵발리드

‘오-리저널(oh-regional)’ 시리즈는 몰랐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오는 감탄사 ‘oh’와 지역의, 지방의을 뜻하는 ‘regional’의 합성어로 전 세계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유래한 재미있는 브랜드 이야기를 다루는 오리지널(original)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금메달 5개 가져다준 양궁장 토템, 황금 돔?!
사상 첫 올림픽 양궁 전 종목 석권이란 역사적 기록이 세워진 프랑스 파리. 여자 단체전에선 10회 연속 금메달을 따냈고 개인전과 혼성 경기 등서 빠짐없이 금메달을 따내며 애국가가 5번이나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온 국민이 지켜본 양궁 결승전마다 과녁을 겨눈 한국 선수 뒤로 반짝이는 금색빛깔 돔이 눈에 띄었는데요. 마치 한국 양궁에 금빛 기운을 가득 가져다 준 행운의 상징 같았습니다.
김우진과 임시현이 2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혼성 단체 결승 독일과의 경기에서 승리,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념촬영 하고 있다. 2024.8.2 파리=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YSH
이번 파리 올림픽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관광명소에서 여러 경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귀족 문화에 뿌리를 둔 승마와 근대 5종 경기는 세계 문화유산이자 프랑스 명소인 베르사유 궁전 앞 마당에서 열립니다. 비치발리볼 경기는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앞에서 펼쳐지고 프랑스 혁명의 중심지였던 콩코르드 광장은 브레이킹과 스케이팅 보드 경기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앵발리드 양궁 경기장 (출처=파리올림픽홈페이지)
또 한국 선수들이 활약한 펜싱 경기장 역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지어진 그랑팔레에서 펼쳐졌습니다. 지난주 흥부전에서 이야기했던 제2회 파리 올림픽이 바로 해당 만국 박람회의 부대 행사로 열리며 치욕적인 올림픽으로 남았다는 걸 상기시켜보면 이번 그랑팔레 경기장은 120년 전 굴욕적이었던 올림픽의 빚을 청산하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앵발리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앵발리드(Les Invalides)’는 5개의 금메달을 딴 양궁 경기장이 마련된 곳입니다. 대한민국 양국팀에 화려한 금빛 대관식을 선사해준 앵발리드. 사실 이 곳은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프랑스의 군인이자 황제, 나폴레옹이 묻혀있는 역사적인 명소입니다.

앵발리드는 엄밀히 말하면 한 개의 건축물은 아닙니다. 나폴레옹을 비롯한 위인들이 안치된 묘지와 예배당, 군사 박물관 등 여러 시설들이 한데 모여져 있는 장소적 개념인데요. 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띄는 황금 장식의 돔이 달린 앵발리드 궁정 교회가 이 곳을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앵발리드 전경
앵발리드는 파리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역사적 기념물로, 프랑스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루이 14세 초상화
루이 14세, 군인을 위한 쉼터를 만들다
앵발리드의 이야기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시절로부터 시작됩니다. 루이14세는 강력해진 왕권을 중심으로 영토확장을 위한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사실상 유럽 대 프랑스의 전쟁이라 불리는 9년 전쟁이 대표적이죠. 여러 주변국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프랑스에게 군대와 군인은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였는데요.

1670년, 루이 14세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거나 노령으로 인해 복무를 할 수 없게 된 군인들이 쉴 수 있는 부상병 간호 시설 겸 퇴역군인 쉼터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여러 전쟁으로 많은 병사들이 다치거나 노쇠하자 이들을 위한 일종의 복지였던 셈입니다.

루이14세 당시 만들어진 앵발리드 조감도
공사는 1671년 시작됐습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들은 궁정 건축가 리베랄 브뤼앙이 설계를 맡아 건축을 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사 기간은 길어졌고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쥘 아르두앙 망사르가 건축 공사를 이어받아 1679년 마침내 앵발리드를 완성했습니다.

망사르는 웅장하면서도 기능적인 건축물을 설계하려 애썼고 특히 이 건물은 아름다운 돔과 정교한 정원을 특징으로 갖고 있습니다. 또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병원 시설을 갖췄습니다.

앵발리드의 다른 이름은 앵발리드 호텔(Hotel des Invalides)인데요. 프랑스어로 호텔은 간병 시설이란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부상병과 퇴역군인을 치료하거나 돌보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앵발리드라는 단어 자체도 사실 장애인 또는 부상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영어 단어 중에서도 invalid의 명사 뜻은 환자나 병자를 뜻합니다. 즉 앵발리드는 그 단어 자체로도 부상병이나 환자들을 돌보는 간병 시설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앵발리드
해당 시설이 완공된 후, 앵발리드에는 갖은 전투를 치러낸 수천 명의 퇴역 군인들이 머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의복, 식사, 의료 서비스 등을 제공받으며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주민이 아닌,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로서 존경받았습니다.
튀렌 자작
전쟁 영웅들 이장을 결심한 나폴레옹
오랜 기간 군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던 앵발리드는 나폴레옹 시대를 맞아 더 중요한 장소로 발돋움합니다. 1800년 9월 나폴레옹이 17세기 프랑스의 30년 전쟁과 스페인전쟁 등을 이끌었던 전쟁 영웅 튀렌 자작의 시신을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 안치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튀렌 자작은 원래 프랑스 왕들의 무덤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됐으나 그의 무덤이 옮겨온 이후 앵발리드는 역사적 위인들을 안치하는 무덤 건축물인 영묘(靈廟)의 기능도 겸하게 됩니다. 이후 1808년엔 이 곳을 조성한 루이14세 시기의 명장 보방 후작의 심장이 안치되는 등 특히 위대했던 군인들의 무덤으로 이용됐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전쟁 영웅들의 무덤들을 옮겨오라 명령했던 나폴레옹 그 자신도 이 곳 앵발리드에서 영원히 잠들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유배지에 갇힌 황제의 시신, 파리로 떠나다
한 때 유럽 전역으로 영향력을 펼쳐가던 나폴레옹은 여러 전쟁에서 패배한 뒤 황제에서 퇴위당한 뒤 1815년 아프리카 대륙의 조그마한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갑니다. 이후 6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낸 나폴레옹은 결국 위암으로 1821년 5월 5일, 향년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프랑스의 영웅이자 유럽의 공포였던 나폴레옹의 사망은 유럽 전역에서도 큰 뉴스였습니다. 프랑스 왕정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인 그의 유해는 20년 가까이 세인트헬레나섬을 벗어나지 못한 채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사망 당시 모습
결국 1840년 복고 부르봉 왕가가 물러나고 취임했던 ‘시민왕’ 루이필리프 1세의 결단으로 나폴레옹의 무덤을 프랑스로 옮겨오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이는 루이필리프 1세가 이전 부르봉 왕들과는 다르다는 걸 프랑스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였습니다. 죽은 나폴레옹조차 두려워했던 이전 왕들과 달리 프랑스 국민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나폴레옹 무덤을 다시 가져옴으로써 민심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장례식과 이장식이 열린다는 소식에 환호했습니다.
나폴레옹 장례식 모습
하지만 여전히 나폴레옹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던 왕가 사람들은 관을 영구차에 숨기는 등 최대한 대중을 피하려 했습니다.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일부 소수의 왕족과 귀족들로 제한됐습니다. 반면 프랑스 제국 근위대 생존자들을 비롯해 나폴레옹의 향수에 젖은 40만의 사람들은 파리에 한데 모여 나폴레옹을 연호하며 그를 추모하려 했습니다. 결국 민심 회복을 위해 기획됐던 해당 이벤트는 민심의 역풍을 불러 일으켰고,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의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는 사건이 됐습니다.
나폴레옹의 관이 개선문을 통과하는 모습
자신이 이장 명령했던 묘지에 묻힌 나폴레옹
당시 나폴레옹의 관은 파리 개선문을 통과해 앵발리드로 향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건설을 지시했으나 완공된 것을 보지 못했던 개선문과 군인 영웅들의 무덤 이장을 명령했던 앵발리드가 결국 자신의 관이 지나가고 묻히는 공간으로 역할한 셈입니다.

프랑스는 단순히 나폴레옹의 무덤을 이장한 것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을 위한 전용 영묘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20년 넘게 공사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1861년 4월 2일, 나폴레옹 1세의 시신이 지금의 형태로 안치됐습니다. 12개의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나폴레옹의 적갈색 석관은 그 이름에서 풍기는 무게감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내려앉힙니다.

나폴레옹 관
이후 이 곳 앵발리드에는 나폴레옹의 형제와 가족,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을 지휘했던 전쟁 영웅들의 시신들이 안치됐습니다.
유럽 제패의 꿈꿨던 히틀러와 나폴레옹의 만남
그리고 이 곳은 프랑스를 점령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3시간 가량 파리에 머물렀던 당시 방문했던 가장 유명한 장소로도 유명합니다. 히틀러는 앵발리드를 말없이 둘러보며 조용히 나폴레옹 1세의 관을 지켜봤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 오스트리아 빈에 묻혀있던 나폴레옹 1세의 아들, 나폴레옹 2세의 시신도 앵발리드로 이장하라고 명령해 아들이 아버지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묵묵히 나폴레옹의 무덤을 살펴보던 히틀러에게 파리 방문은 그 때가 처음이지 마지막이었고 유럽 제패라는 꿈을 꿨던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최후는 잘 알려다졌다시피 무력했습니다.

앵발리드서 나폴레옹 관을 보고 있는 히틀러
오늘날 앵발리드는 군사 박물관으로서 프랑스의 군사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유물과 전시품들을 소장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또한, 여전히 전쟁에서 다친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한 재활 시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죽은 나폴레옹과 살아있던 히틀러가 머무르고 지나쳤던 공간. 유럽 역사에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있는 두 인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적 공간 곁에서 쓰인 한국 양궁의 새 역사도 영원토록 기억될 것입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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