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만으로 42.195km를?…100년 전 마라토너들 ‘마성의 음료’ 마시며 달렸다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8. 1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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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태극 전사들의 활약이 매일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의 선전이 예상되는 경기가 있을때면 시차 때문에 밤을 새더라도 경기를 챙겨보기도 하죠. 선수들이 올림픽이라는 최고의 무대에 서기 위해 흘린 땀방울의 무게를 알기에, 결과에 상관 없이 박수와 갈채를 보냅니다.

우리는 중요한 스포츠 경기를 볼 때면 치맥, 치킨과 맥주를 시켜 놓고 즐기며 관람하는 게 익숙합니다. 비단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쉽게 접할 수 있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맥주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요 스포츠 경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료로 각광 받습니다. 그리고 맥주가 유행하기 전, 그러니까 20세기 중반까지는 와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요.

하지만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현장 관중은 맥주와 와인은 커녕 그 어떤 알코올 음료도 마실 수 없습니다. 파리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일반 관중의 경기장 내 알코올 음료 구매 및 음용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1991년 프랑스에서 제정된 에빈법(Evin’s Law)에 따른 것인데요. 공공장소에서의 알코올 접근성을 줄여 알코올 남용과 관련된 건강 문제를 예방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사실 국제적인 메이저 대회에서 경기장 내 알코올 금지는 파리 올림픽이 처음이 아닙니다. 주최국의 종교적 특성 때문이었지만, 이미 지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경기장과 주변 일부 팬존에서 알코올 음료를 판매하지 않아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죠.

그런데 최근 추세와 다르게, 근대 올림픽 초창기에는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와인을 권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마라톤 선수들은 아예 경기 중에도 물 대신 와인을 마셨다고 하죠. 이번 와인프릭은 초창기 올림픽 마라톤에 얽힌 와인을 얘기해봅니다.

AI가 생성한 올림픽과 와인의 이미지.
경기 중이지만, 와인은 못 참지!
알코올과 올림픽의 인연은 근대 올림픽이 열린 첫 해인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 경기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올림픽의 피날레, 마지막 경기는 첫 회부터 지금까지 항상 마라톤이 도맡아 왔는데요.

바로 이 마라톤 경기에서 올림픽과 알코올 음료가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됩니다. 마라톤, 42.195㎞를 쉬지 않고 뛰어가는 극한의 경기죠. 고대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의 마라톤 평야 전투 승리 소식을 전하기 위해 40여㎞를 쉬지 않고 뛰어 승전보를 전한 후 숨을 거둔 병사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를 기리는 경기입니다.

첫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페이디피데스의 후손, 그리스 국적의 스피리돈 루이스는 경기 30㎞ 지점을 지나다 그 지역 자신이 잘 아는 여관에 들러 와인 한 잔을 마시고 다시 힘을 내 뛰었다고 합니다(꼬냑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당시 그의 잔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루이스가 경기 중간에 어떤 종류의 알코올을 마셨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죠.

재밌는 것은 그의 성적입니다. 극한의 경기 도중 술을 마신 그는 몇 등을 했을까요. 놀랍게도 2시간 58분 50초의 기록으로 1등을 거머쥡니다. 그의 체력이 대단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경기 중 와인 한 잔의 힘이였을까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초대된 스피리돈 루이스.
독극물과 브랜디를 섞으면 에너지드링크?
두 번째 올림픽이었던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은 40㎞가 넘는 코스 중 에이드 스테이션(물 공급소)을 단 1곳에만 설치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경기 당일 기온은 화씨 90도(섭씨 32.2도)에 달했고, 경주 관계자를 태운 차량이 참가자들을 질식시킬 정도로 먼지 구름을 일으켜 선수들이 코스를 이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다른 선수들보다 한참을 앞서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는 프레드 로즈 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10마일(약 16㎞)이나 차를 타고 이동한 게 발각돼 즉시 실격 처리 됐죠.

두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금메달을 거머쥔 선수는 토마스 힉스 입니다. 그는 물이 부족해 심각한 탈수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지원 스텝이 주는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면서 끝내 결승선을 통과했는데요. 경기를 치르고 난 후 몸무게가 8파운드(약 3.62㎏)나 빠져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가 마셨다는 에너지드링크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에너지드링크는 유사과학에 가까운 음료였습니다. 당시 기록엔 신선한 계란 흰자와 브랜디, 스트리크닌(독약의 일종)을 섞은 음료로 돼있는데요. 이 때문에 힉스는 경기 중반 이후 사실상 환각 속에서 레이스를 펼쳤고, 경기 종료 직후 들것에 실려나가 처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다만 감안해야 하는 것은, 초창기 마라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완주가 힘든 경기였다는 점 입니다. 당시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다양한 행위가 가능했습니다.

지원 스텝(도우미)의 부축을 받으며 뛰고 있는 토마스 힉스.
모두가 샴페인을 마시고 뛰었다
1908년 런던에서 열린 세 번째 올림픽의 마라톤은 가히 최악의 음주 마라톤 경기었습니다. 우승 후보로 꼽혔던 캐나다의 톰 롱보트는 내리 쬐는 햇볕을 견디기 위해 시합 전부터 샴페인을 연거푸 마시다가 결국 취해 쓰러져서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선두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찰스 헤프론은 38㎞ 지점에서 공급된 샴페인을 마시고 복통으로 선두 자리를 내줬고, 헤프론에 이어 선두가 된 이탈리아의 도란도 피에트리도 샴페인의 영향으로 여러 번 쓰러졌습니다만, 끝내 1등으로 들어옵니다.

피에트리가 여러 번 쓰러지면서도 1등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선수들이 그보다 더 많이 쓰러졌기 때문이라고 하죠. 결승선을 통과하고 쓰러진 피에트리의 손에는 샴페인 코르크가 쥐어져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다 올림픽의 대미, 마라톤이 음주 달리기의 장이 됐을까요? 당시 과학의 한계였습니다. 트레이너들은 높은 설탕 함유량을 보여주는 샴페인과 브랜디가 에너지를 증가시키는 합법적인 에너지 향상 물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샴페인은 ‘함유된 탄산의 청량감 때문에 더 힘을 준다’는 속설이 선수들 사이에 돌았습니다.

실제로 1908년 시카고 마라톤에서 우승자였던 앨버트 코리는 우승 후 인터뷰에서 “(에이드 스테이션에서) 샴페인을 꾸준히 공급받은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100년 전인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까지도 이어집니다. 이때까지도 마라톤 에이드 스테이션에는 여전히 선수들을 위한 샴페인과 화이트 와인이 구비됐다고 합니다.

190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도란도 피에트리가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막간이 주어지는 종목이라면 누구나 와인을
다행인 것은 암스테르담 올림픽을 기점으로 마라톤 경기 중 와인을 마시는 문화가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그 무렵 전쟁과 기상 이변으로 와인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알코올이 마냥 경기력 향상에 도움을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라톤에서만 와인이 음용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거의 모든 종목에서 선수들은 쉬는 시간이나 자신의 차례가 아닐 때 와인을 들이켰다고 합니다. 골프나 테니스, 사격 같은 인터미션(막간)이 주어지는 종목에서 선수의 기호에 맞는 와인을 구비해 제공하는 것은 지원팀에게 중요한 업무였다고 하죠.

다만 경기 전후 선수들의 개별적인 음주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도핑 테스트가 처음 실시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스웨덴의 근대 5종 경기 선수 한스-군나르 릴렌발이 적발됐는데, 경기 직전 긴장을 풀기 위해 마신 맥주 2병 때문이었던 게 밝혀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경기장 내 음주 금지인 파리올림픽의 공식파트너인 세계적인 맥주회사 ABInBev [출처=olympics.com]
경기장 내 음주 안되지만 스폰서는 맥주 회사?
한편 가장 잘 알려진 스포츠 행사인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나란히 연속해서 알코올 음료 판매를 금지하면서, 스포츠 경기장 내 음주 금지는 점차 글로벌 트렌드로 굳어질 전망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현재는 알코올의 폐해가 잘 알려져있기 때문에 큰 반발도 없어보이죠.

아쉽게도 이번 파리 올림픽의 안티알코올 정책은 몇 가지 자본주의적 아이러니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일례로 VIP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은 별도의 법적 규제에 따라 알코올 음료를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경기장 내 VIP 구역에서 제공되는 샴페인과 와인, 맥주 등을 즐기며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요. 돈을 많이 지불할 수 있다면 술을 마셔도 된다는 논리는 현대 사회의 관점으로는 괴이해보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파리 올림픽의 공식 스폰서(월드와이드 올림픽 파트너)로 벨기에의 다국적 맥주 회사인 ‘AB InBev’가 선정된 것도 뭇 세계인의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음주를 금지해놓고, 정작 세계 최대 맥주 회사가 제공하는 후원은 받아야겠다는 심보라고요.

AB InBev는 레페, 롤링락, 버드와이저, 벡스, 스텔라 아르투와, 코로나, 하얼빈, 호가든, 우리나라의 카스 등 브랜드를 보유한 초대형 맥주 회사 입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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