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몰랐나?" 플랫폼 티메프서 벌어진 기적의 돈놀이 [視리즈]
티메프 사태와 사후약방문 1편
셀러 돈 ‘쌈짓돈’ 취급한 플랫폼
한국처럼 정산주기 긴 나라 드물어
아마존·이베이 ‘현금’처럼 결제 진행
금융사 아닌데도 그림자 금융 역할
어음 닮았지만 어음처럼 규제 안 해
대책 나와도 재발할 가능성 높아
# 티몬과 위메프는 소비자와 셀러(sellerㆍ판매자)를 잇는 일종의 '정거장(플랫폼)'이다. 셀러는 플랫폼에 제품을 올리고,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는 셀러가 아닌 플랫폼에 값을 지불한다. 플랫폼 업체들은 여기서 수수료를 뗀 다음 셀러에게 돈을 전달하는데, 위메프는 두달, 티몬은 40일이 원칙이었다. 셀러에게 지급할 돈을 일종의 '어음'처럼 준 셈인데, 이번 티메프의 미정산 사태는 여기서 시작했다.
# 이런 경로를 보면, 티메프 미정산 사태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어음을 '손톱 밑 가시' 취급하면서 규제한 것처럼, 이커머스 업체의 '정산주기'도 통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베이, 아마존 등 글로벌 이커머스 업체들의 '정산주기'는 우리나라처럼 길지 않다. 이베이는 이틀, 아마존은 길어야 보름 안팎이다. 티메프 미정산 사태에 불을 붙인 게 어쩌면 정부와 국회의 '불구경'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 이제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소비자가 셀러에게 지급한 돈을 '내 쌈짓돈' 취급하는 이른바 '플랫폼'의 돈놀이를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까. 아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규제책을 만들어야 할까.
"유동성 부족." 기업을 벌벌 떨게 하는 단어다. 쉽게 말해 기업의 현금이 제때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는 건데, 이 단순해 보이는 현상은 의외로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다. 당장 갚아야 할 차입금의 숫자가 크지 않더라도 경기 침체와 금융 경색까지 덮치면 느닷없이 회사가 무너질 수 있다. 상당한 이익을 내고 있는데 현금이 부족해 '흑자 도산'하는 기업이 그런 케이스다.
물론 장사를 망치거나 상품이나 서비스를 못 팔아서 현금이 부족한 거라면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제품을 잘 만들고 제대로 팔거나 납품했는데도 현금이 없을 때다. 티몬ㆍ위메프가 벌인 '미정산 사태'가 이런 경우다.
■ 본질적 문제➊ 유용 = 사건은 큐텐그룹 계열사인 티몬과 위메프에서 대금 정산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7월 말 드러나면서 터졌다. 물건을 팔았는데 돈을 못 받은 입점업체, 이른바 셀러(seller)의 피해가 속출했다.
정부는 이렇게 지급되지 않은 돈의 규모를 2745억원으로 파악했다. 무서운 건 이 숫자가 전부가 아니란 거다. 정부는 5월 말까지 거래된 상품을 기준점으로 삼았다. 6~7월분을 더하면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커질 게 뻔하다.
다만, 정부가 8월 중순을 넘어가는 지금까지 '5월분 미지급 정산금'만 따지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티메프가 소비자 결제금액을 곧바로 셀러에 전달하지 않고 임의로 두달가량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플랫폼은 구매 후 최대 60일 이후에야 판매대금을 정산했다. 제품을 판매한 입장에선 정산을 받기 전까진 아무 까닭 없이 돈줄이 묶여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티메프와 모회사 큐텐이 셀러에게 당연히 줘야 할 돈을 '쌈짓돈'처럼 썼다는 점이다. 구영배 큐텐 대표는 국회가 판매대금의 행방을 추궁하자 처음엔 "정확히 모르겠고, 지금은 이야기할 시점이 아니다"라고 피했다가 글로벌 온라인 쇼핑몰 위시를 인수할 때 일부 사용했다는 걸 인정했다.
매달 수천억원에 달하는 '남의 돈'을 두달가량 제멋대로 굴렸고, 심지어 이를 사세 확장을 꾀하겠다며 유용했다. 이 돈을 정기예금에만 예치해도 연 3%대 이자, 수십억원의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적의 돈놀이'나 다름없었다.
■ 본질적 문제➋ 유사어음과 정거장 = 많은 전문가는 티메프 사태의 원인을 '폰지사기(Ponzi schemeㆍ아무런 이윤 창출 없이 투자자들이 투자한 돈을 이용해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지급하는 방식)'로 보고 있다. 고객에게 받은 돈으로 정산금을 '돌려막다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언뜻 그런 것도 같다.
판매금 정산이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판매를 강행하고, 이 돈을 다른 용도로 쓴 경영진의 사기 행위라는 거다. 실제로 티메프는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없었다. 두 회사 모두 완전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있고, 모회사 큐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초점을 '폰지사기'에 맞추면 논의의 범위가 작아진다. 티메프 사태엔 한국경제의 '본질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다름 아닌 '유사 어음'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을 한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돈을 내면, 그 돈이 바로 판매자에게 꽂힐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현금으로 계산할 때를 제외하면 의외로 그렇지 않다. '현금 외 결제'의 뒷단에선 '지급→청산淸算→결제'의 단계를 거치는 '지급결제 시스템'이 작동한다. [※참고: 현장에선 지급 다음의 행위를 정산定算(금액을 정하는 행위)이라고 표현하지만, 정확한 법적 용어는 청산이다.]
예를 들어보자. 직장인 A씨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 카드 단말기에 삼성페이를 켜고 스마트폰을 댔을 때, 이 행위는 지급이다. 이 정보는 곧장 금융결제원으로 통보된다. 금융결제원은 '내 은행계좌에서 빠져나갈 돈은 얼마이고, 카페 주인의 계좌에 얼마를 줘야 하는지'를 계산하는데, 이게 '청산'이다. 이렇게 청산한 내역을 각 금융기관에 통보하면, 예금에서 실제로 돈이 들어오거나 빠져나간다. '결제'다.
현금 거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거래가 이런 경로를 통한다. 지급결제는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금융시스템의 하부 인프라다. 특히 최근 들어선 디지털 혁신으로 지급수단이 다양해졌고, 이 시스템에 관여하는 회사도 많아졌다.
공교롭게도 이커머스 플랫폼 티몬과 위메프도 그중 하나였다. 이른바 전자지급결제대행(PG) 업자로 등록하고, 지급결제 정보를 송ㆍ수신하고 대금 정산업무를 대행해왔다. 이커머스이자 PG 업체였던 티메프가 대금을 임의로 가져다 쓸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럼 티메프에서 제품을 사면 지급결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할까.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고객은 셀러로부터 제품을 받지만 돈은 셀러가 아닌 PG사에 지급한다. PG사는 수수료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판매자에게 건넨다. PG사는 돈이 흐르다 멈추는 일종의 '정거장'인 셈이다. 티메프 등 이커머스업체를 '플랫폼 기업'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방기홍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상임회장은 "대부분의 거래가 디지털로 옮겨오면서 고객은 편해졌다지만, 중소업자 입장에선 매출을 따지거나 부가가치세를 신고할 때 더 까다로운 점이 많아졌다"라면서 "티메프 같은 부실한 업체가 어떻게 지급결제 시장에서 중책을 맡을 수 있었는지 국민들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 본질적 문제➌ 그림자 금융의 덫 = 실제로 티메프는 금융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PG업무를 통해 금융사 역할을 했다. 이른바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이다. 심지어 보증보험을 든 것도 아니고, 담보를 걸어둔 것도 아니다. 셀러는 오롯이 회사 이름값만 믿고 이들이 지급결제 시스템을 온전히 수행할 것이라고 봤다. 마치 제조업 원청사가 하청업체에 "몇개월 뒤 주겠다"고 약속한 어음처럼 말이다.
어음도 지급결제의 방식 중 하나다. 발행인이 자신의 거래은행에 맡겨 놓은 돈을 어음을 받는 기업에 지급할 걸 요청하는 수단이다. 다만 실제 예금계좌로 입금하는 '현금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지급결제가 완료되지 않는다. 경제가 출렁일 때마다 시장에 발행된 어음이 여러 중소기업을 유동성 위기에 몰아넣었던 이유다.
만기가 돼서도 돈을 못 받으면, 그땐 어쩔 도리가 없다. 어음은 그대로 부도가 난다. 누구도 지급보증을 해주진 않는다. 단순히 회사가 자체 신용도를 근거로 발급한 종이에 불과하다.
더 깊숙이 따져보면 티메프의 미정산 사태는 어음보다 악질이다. 어음은 어음법이란 근거법을 따르고 있지만, 이커머스사의 미정산금은 법적 제도적 토대조차 없다. 금융당국도 당연히 감독하지 않는다. PG사는 전자금융거래법의 적용을 받는데, 마땅한 운영 규정도, 정산 주기를 규정한 가이드라인도 없다. 그렇다고 PG사로 등록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자본금 10억원, 부채비율 200% 이내란 최소한의 재무적 요건만 갖추면 끝이다.
조혜경 금융경제연구소장은 "금융당국이 전자금융거래를 금융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은행과 달리 풀뱅킹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금융사가 아닌 건 아니다"면서 "업무범위가 제한돼 있다고 하더라도 금융서비스를 영위하면 누구나 금융기관으로서 동일기능ㆍ동일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 본질적 문제➍ 대책의 사각지대 = 사건이 확전 양상을 보이면서 정부도 특단의 재발 방지책을 꺼냈다. 이커머스의 정산 기한을 최장 40일 이내로 의무화하고, 입점업체에 지급해야 하는 정산대금의 일정 비율을 별도로 관리하도록 법을 개정하겠다는 식이다. 22대 국회에서도 벌써부터 '티메프 사태 방지법'을 쏟아내고 있다.
다만, '소 잃은 후 외양간 고치기'식 대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커머스 업계 관계자는 "이미 대부분의 플랫폼이 정산기한을 짧게 두고 있고 대금을 유용하지 못하도록 장치도 두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그런데도 미정산 사태가 우려스러운 건 장치들의 효과가 별로 없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장 오는 9월엔 머지포인트 사태 방지법이 시행되는데, 선불전자지급업자를 규정하는 법인 탓에 티메프엔 제대로 적용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식의 규제론 효용이 없다"면서 "오히려 진짜 문제는 혁신과 편의성을 끌어올리겠다며 지급결제 시스템을 교란하는 그림자 금융 사업자들"이라고 꼬집었다.
갈수록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지급결제 시스템을 고려하면 '기적의 돈놀이'는 언제든 모습을 바꿔 또 출연할 가능성이 높다. 꼭 이커머스가 아니더라도 이런 참극은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질 수 있다. 다만, 이커머스 등 플랫폼 업체들이 '정산주기'를 왜 길게 잡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내 돈도 아닌 셀러의 돈'을 멋대로 잡고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글로벌 플랫폼 업체 아마존과 이베이는 짧으면 이틀, 길어야 20일 안에 셀러에게 판매대금을 지급한다. 이처럼 국내 이커머스 업체의 '정산주기'는 꼭 어음과 닮았다. 십수년 전인 박근혜 정부 때부터 우린 어음을 '손톱 밑 가시'처럼 빼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정작 어음과 닮은 긴 정산주기엔 어떤 규제장치도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이커머스 업체들의 몸집은 커질 대로 커졌고, 모럴해저드 역시 부풀어 올랐다. 티메프 사태에 불씨를 제공한 건 정부와 국회의 '불구경'일지 모른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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