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에 있었다는 수영장 이야기[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8. 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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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73

고급 한옥과 카페거리로 유명한 서울 삼청동에 수영장이 있었다는 걸 아시나요? 100년 전 신문에서 삼청동에서 물놀이하는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줄기 아래에서 한 소녀가 더위를 식히고 있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 모습이 지금의 사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련된 풍경입니다. 1924년 8월 8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이곳 주변은 나중에 수영장이 들어섭니다.

◇ 목욕 = 삼청동 시내에서/ 1924년 8월 8일자 동아일보
삼청동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많고 골짜기도 아름다워 옛날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학자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서울 안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제일이다. 인왕동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라며 서울의 첫번째 명소로 삼청동을 꼽았습니다. 이이 선생도 [율곡전서]에서 “돌 사이 샘물은 그윽한 곳에서 울음 우는 듯하고, 해질 무렵 구름은 깊은 골짜기에서 생겨나니, 이를 따라 도리어 산의 문을 잠그는 듯 하네”라며 삼청동을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삼청동은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에게는 놀이와 감상의 대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삼청동의 이미지는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져서 각종 야유회가 열리고 자유연애를 하는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특히 삼청동을 가로지르는 삼청동천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여름이면 쏟아져 내리는 물을 이용한 목욕장소이자 물놀이 장소였고, 겨울에는 얼어있는 삼청동천 위에 스케이트장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출처: 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삼청동에 신설된 스케-트장/ 1932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3면
삼청동 수영장의 역사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소녀의 환한 웃음 사진과 달리 신문에 실린 삼청동 물놀이장 관련 뉴스는 어두운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신문이라는 게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사람들의 안전과 관련한 뉴스를 많이 다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수영장 풍경부터 보시죠. 1922년 삼청동 계곡 모습입니다.
물나라의 시절 = 어제 삼청동에서/ 1922년 7월 25일자 동아일보.
꽤나 넓은 곳에서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924년 6월 30일자 동아일보에는 삼청동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 12살 아이가 물에 빠져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내 인사동(仁寺洞) 29번지에 사는 윤보인(尹報仁)의 장남 순보(順甫) 열두살된 아이는 재작일 오후 세시경에 삼청동(三淸洞) 세균시험실 뒤에 있는 개천에서 여러 아이들과 목욕을 하다가 빠저 죽었다더라.

자연 계곡에서만 물놀이를 할 수 있었던 삼청동에 사업가들이 수영장을 만든 것은 1930년대 초입니다. 위의 소녀 사진 이후 7년이 흐른 1931년 7월 19일자 기사(아래)를 보면 삼청동 계곡에 풀장을 만들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사업가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청동 청계에 류영장(遊泳塲)을 출원(出願)>

부내 팔판동(八判洞) 김용계(金容偰)와 삼청동(三淸洞) 재등창장(齋藏倉藏)등의 15명은 산좋고 물맑은 삼청동 삼청천에『뻬비、풀』을 설치코저 얼마 전에 그의 원서를 경성부에 제출하얏든 바 부당국에서도 그를 시인하야 불일간 허가하리라한다

그 설계의 내용을 보면 삼청동 삼청천의 지류(支流)를 막고 그 위에 저수지(貯水池) 2개소를만들어 수심(水深) 6척의 류영장(遊泳塲)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의 총면적은 1100 평으로 길이가 50미돌 넓이(幅)가 13미돌이라한다

그런데 삼청동 계곡의 익사 사고는 풀장이 설치된 이후에도 가끔 발생했습니다. 1933년 6월 23일 기사입니다. 고등학생이 죽었다는 뉴스입니다.

<학생 익사(學生溺死)>

부내 중학동(中學洞) 23번지 미곡입자 함영열(咸英烈)의 둘째 아들인 제일고보교(第一高普校)1년생 함홍식(咸鴻植)(14)은 작 21일 오후3시경에 동무들로 더부러 부내 삼청동(三淸洞)수영장에 목욕을 나갓다가 잘못하야 물에 빠저 죽엇다 한다.

같이 수영 나갓든 그의 동무는 제일고보교 3년생 윤건로(尹健老)(16)와 그의 아우 윤강로(尹强老)(14)등의 두 명으로 그들은 전기 함흥식과 목욕을 하다가 먼저 돌아왓다.

그후 전기 함홍식은 물이 깊지도 아니한 곳에서 그만 빠저 죽은것인데 이를발견하기는 22일 오전 1시 10분경이라한다.

그같이 늦게야 발견한 까닭은 그의 집에서도 늦게야 찾기 시작하고 종로서에서도 밤11시경에야 그의 입엇든 교복이 삼청동『풀』언덕에 잇다는 말을 듯고 출동한 까닭이라 한다.

● 지금이야 삼청동으로 물놀이를 가는 경우가 없지만 삼청동 계곡은 한 때 군부대의 휴양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1987년 7월에 가로 7m, 세로2.5m, 최대 수심 2.7m의 군인 수영장이 준공되었습니다. 청와대 뒷산을 가로지르는 북악 스카이웨이가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관리되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다 청와대 뒷길이 개방되면서 등산하는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하여 영구 폐쇄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북악산(백악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 (삼청안내소를 지나 삼청휴게소로 가는 길)에는 군부대 수영장으로 쓰였던 시절의 콘크리트가 파란색 페인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계곡을 복원하면서 일부러 남긴 건지 실수로 덜 치운 것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 시민들이 삼청동 계곡으로 수영을 다니는 것이 언제 끝났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1932년 한강 인도교에 큰 수영장이 개장하면서 인기가 좀 시들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1932년 7월 21일 기사입니다.

한강 수영장, 비 개면 개장

일찍이 경성부(京城府)가 공사중의 한강수영장은 공사가 완료되어 19일 오전 10시에 현장에서 관계자와 용산서 입회로 인계를 마친바로는 위험방지의 경계선 22본과 감시원임치, 다이빙대(飛込), 휴게실, 탈의장에 새로 남녀별 세면소를 설치하였다. 우기가 그치는 데로 곧 일반 부민의 수영장으로 개장할 터이라 한다.

●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여름철 물놀이를 하고 있던 소녀의 사진을 통해 삼청동 물놀이장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삼청동 수영장에 대해 여러분의 추억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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