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세대 女전사들, 한국 사격의 르네상스 이끈다
한국 사격, 오늘보다 내일이 더 밝아
(시사저널=김종수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가장 크게 빛난 종목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사격을 말할 수 있다. 10m 공기소총의 반효진(17), 10m 공기권총의 오예진(19), 25m 권총의 양지인(21)이 금빛 방아쇠를 당겼고, 10m 공기권총의 김예지(32), 10m 공기소총 혼성의 박하준(24)-금지현(24), 25m 속사권총의 조영재(25)가 은빛 총성을 울렸다.
이번 대회에서 메달 6개(금메달 3개·은메달 3개)를 획득해 역대 올림픽 최다 메달 기록을 경신한 사격계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다. 한국 메달 전선의 효자종목으로 거듭나며 전 국민의 뜨거운 성원을 받고 있다. 10대와 20대 초반의 선수가 대부분이라 현재의 기세만 이어간다면 양궁과 더불어 오랫동안 세계무대에서 강호로 군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사실 사격의 이 같은 선전은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결과다. 미국 스포츠 전문잡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와 영국 슈퍼컴퓨터 등은 이번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한국의 예상 성적을 금메달 5개로 전망했다. 양궁 남녀 단체전과 혼성단체전, 배드민턴 남자 복식,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 등이 금메달 유력 종목으로 꼽혔다. 사격은 아예 거론되지도 않았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의 스포츠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고 서운할 수도 있었겠으나, 이는 한국 선수단이 목표로 했던 '금메달 5개, 종합 15위'와 일치하는 예상 성적이었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번 올림픽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뚜껑을 열자 한국은 예상의 두 배를 넘는 금메달을 수확하며 10위권 내 진입이 확실해졌다. 반전 드라마의 중심에 바로 사격이 있다.
슛오프 접전에서도 놀라운 집중력과 담력 보여줘
'이렇게까지 잘하는데 금메달 한 개도 예상되지 않은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다. 해외 전문매체에서도 한국 사격이 저평가를 받은 데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도 있었다. 대한민국 사격은 그동안 홀로 4개의 금메달을 수확했던 진종오가 은퇴한 이후 한국의 주력종목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2020 도쿄올림픽 여자 25m 권총에서 김민정이 은메달을 따내며 간신히 명맥을 이어왔으나 진종오를 제외한 한국 대표팀의 마지막 금메달은 2012 런던올림픽 25m 권총의 김장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동안 종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는 했으나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만 참가하는 올림픽의 높은 압박감과 경쟁은 또 다르다. 세계무대에선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 만큼 이름도 생소한 1020세대들이 이렇듯 놀라운 담력을 보여줄 것이란 기대를 우리조차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격 대표팀의 총구는 이번 올림픽 내내 거침없이 뜨거웠다. 대회 첫날부터 10m 공기소총 혼성종목에서 박하준과 금지현이 한국 선수단에 첫 메달을 은빛으로 안겼다. 예상 밖 선전에 사격 대표팀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7월28일 여자 10m 공기소총 결선에서는 오예진과 김예지가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눠가지며 시상대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채웠다. 여자 공기권총에서 한국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로 기록된 오예진은 결선에서 243.2점의 올림픽 신기록까지 세우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후배 오예진에 밀려 은메달에 머물기는 했지만 김예지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 엑스(옛 트위터)를 중심으로 과거 영상들이 공개되면서 세계적으로 크게 화제가 됐다. 사격을 할 때의 집중하는 표정과 눈빛 등이 많은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일약 올림픽 인기 스타로 떴다. 세계적인 부호 일론 머스크도 김예지의 영상에 답글을 달았을 정도다.
7월29일에는 이번 파리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단에서 가장 어린 반효진이 대형 사고를 쳤다. 여자 10m 공기소총 결선에서 슛오프 접전 끝에 한국 하계올림픽 역사상 최연소 금메달리스트에 등극한 것이다.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통산 100번째 금메달, 올림픽 사격 역대 여자 최연소 금메달이라는 이정표까지 세웠다.
8월3일 여자 25m 권총 결선에서는 양지인이 또 한 번의 이변을 만들어냈다. 양지인은 슛오프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격 대표팀의 이번 대회 3번째 금메달이자 대한민국 사격의 통산 10번째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거둔 3개의 금메달이 무엇보다 기분이 좋은 것은 오예진·반효진·양지인의 향후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할 정도로 아직 한창의 나이라는 점이다. 21세의 양지인이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을 정도로 영건 일색이다. 지금도 세계 최고 명사수 군단에 속해 있지만 그러한 명성을 앞으로도 꾸준히 기대할 수 있는 나이대다.
"오랜 시간 다져온 토대가 이제 열매 맺어"
오예진과 반효진은 친구 따라 사격선수가 된 경우다. 오예진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사격부에 놀러 갔다가 코치의 권유로, 반효진은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사격을 시작했다. 양지인은 중학교 때 수행평가 때문에 처음 사격을 접했다.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지만 숨겨진 재능에 더해 사격연맹의 좋은 시스템이 더해져 이렇듯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사격연맹 관계자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금 안팎의 분위기는 매우 좋다.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국 사격이) 달라진 비결을 묻는 질문이 많은데 여러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다시피 휴대전화(Cellular)·커피(Coffee)·담배(Cigarette) 등 이른바 '3C' 금지령, 합계 점수 중심에서 올림픽 결선처럼 맞대결 성적의 비중을 높인 점 등 여러 가지 부분이 복합적으로 좋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갑작스럽게 좋은 성적이 나오자 우리 협회가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같이 포장되는 기사도 많은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며 "단기간의 변화로 어떻게 올림픽 같은 큰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는가. 그전부터 꾸준히 노력해 왔는데 당장 성적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오랜 시간 다져온 토대가 드디어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현재 사격연맹은 오랫동안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화그룹과의 인연이 마무리된 상태에서 새로운 스폰서가 절실한 상황이다. 거기에 더해 얼마 전 연맹 회장으로 취임한 제31대 신명주 신임회장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장 자리에서 내려옴에 따라 집행부 변화도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사격이 보여준 뛰어난 성적으로 국민적인 관심이 커진 만큼 조만간 정상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어쩌면 한국 사격의 진짜 전성기는 평균 나이 19세에 불과한 금빛 여전사 3명이 총대를 메고 나선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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