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양조·종교가 함께 하는 미학, 나를 담을 집은... [ESC]
배우 최다니엘과 동행하며 감상
수국·야생 정원 ‘도레도레 빌리지’
금풍양조장, “세월 흔적에 압도”
‘쉼터’ 채플갤러리와 ‘한옥’ 성당
‘집’은 인간의 역사를 담는 그릇이다. 지은 이나 머문 이의 서사가 집이란 공간에 새겨진다. 시간을 관통한 서사엔 감동이 있기 마련이다. 과거의 ‘나’를 반추하고 먼 훗날의 ‘나’를 상상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건축 여행은 깊은 내면에 침잠해 있는 자신에게 가닿는 고즈넉한 여정이 된다.
인천에서 대략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강화도에는 이야기가 많은 ‘집’이 여럿 있다. 지난 2일, 강화도 건축 여행에 배우 최다니엘이 동행했다. 2000년대 ‘대박’ 친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MBC)에서 열연했던 그가 최근 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MBC)나 ‘전지적 참견 시점’(MBC) 등에 출연해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는 말했다. “여행을 자주 다니지는 않지만, 건축, 집 보는 건 좋아한다”고 말이다. 좋아하면 실력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배우가 건축가보다 더 건축가 같다”
지난 2일 오후,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도레도레 빌리지’(이하 빌리지)가 흰색 수국 수천송이와 함께 여행객을 맞았다. 1만6528㎡(약 5000평) 규모의 빌리지는 카페 ‘도레도레 강화점’과 ‘마호가니 강화점’, 커피 로스팅 공간인 ‘셀 로스터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수국정원, 에스엔에스에서 ‘힙한 여행지’로 자주 언급되는 데이지정원과 야생정원 등이 함께하고 있었다. 빌리지는 커피집 몇 개가 모인 카페촌이 아니라, 하늘 높이 솟은 나무와 걷기 편한 좁은 길이 주인공인 울창한 숲이다. 462㎡(140평)인 ‘도레도레 강화점’, 396㎡(120평)의 ‘마호가니 강화점’, 495㎡(150평) 규모인 ‘셀 로스터스’의 면적을 다 합쳐도 총 크기는 고작 1353㎡. 나머지 공간을 채운 건, 잘 다듬어진 나무와 꽃들이다. 그래서일까, 건물들은 꼭꼭 숨어있는 것처럼 그 자태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한차례 소나기 세례를 맞은 나무들 사이에서 발돋움을 겨우 해야 건물의 솟은 지붕 끝자락이 보였다.
‘도레도레 강화점’은 2014년 인천광역시가 수여하는 건축상을 받은 건축물이다. 2006년 인천 구월동에서 창업한 식음료 전문 브랜드 기업 ‘도레도레 컴퍼니’ 김경하 대표의 부친인 이토건설 김시춘 회장이 2010년부터 3년에 걸쳐 완공한 건물이다. 마침 이날 설계를 맡았던 인하대 구영민 교수(건축학과)가 이곳을 찾았다. 그는 “건물이 잘 안 보이게 하는 게 중요한 콘셉트”였다며 “지은 집이 도드라지면 (주변) 자연과 맞추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만큼 여기는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또 다른 자연이 보이도록 했죠. 창문을 통해 보이는 자연은 또 다른 미학을 선사합니다.”
그의 말은 맞았다. 차례로 들어간 건물들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풍광은 한쪽 벽을 다 차지한 커다란 창과 그 창의 격자 모양 틀 너머로 보이는 조각난 자연이었다. 최다니엘은 “건물색이 온통 화이트인데, 나무의 짙은 녹색과 잘 어울려 자연을 더 자연답게 한다”고 평했다. 이에 구 교수는 “배우가 건축가보다 더 건축가 같다”며 웃었다. 2012년 3월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 승민과 겹쳐 보이는 배우 최다니엘. 서툰 사랑을 연기한 주인공 승민 역을 그가 맡았다면 다른 색의 ‘건축학개론’이 완성되었을 게다.
강화도 남쪽에 자리한 해발 472.1m의 마니산 자락에 터를 잡은 빌리지는 해풍과 작렬하는 태양, 이 둘을 고스란히 영접한 정원이 한데 어우러져 여행객들에게 속삭인다. ‘당신이 달려가는 세상에선 뭘 담고 싶은지’ 말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93년된 양조장
빌리지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금풍양조장’. “금풍아, 금풍아!” 양태석 대표가 건물 들머리에서 어슬렁거리는 개 한 마리를 불렀다. 갑자기 들이닥친 여행객들의 소란스러운 대화에 올해 4살 된 금풍이만 신이 났다. 2022년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금풍양조장은 김학제씨가 1931년에 지은, 지상 2층 연면적 433.41㎡ 규모의 건축물이다. 일부분은 개보수했지만, 골조 등 건축 당시의 구조 대부분이 보존돼 있다. 1930년대 근대 공장의 건축 양식을 유추해볼 수 있는 귀한 자료로, 당시 강화도 지역에서 양조산업을 필두로 한 산업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왕겨로 만든 벽과 술 만드는 데 사용된 우물이 남아있다. 1969년 양 대표의 조부 환탁씨가 인수한 금풍양조장은 부친 재형씨를 거쳐 2020년 태석씨가 본격적으로 운영을 맡으면서 ‘체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금풍’의 ‘금’자는 쇠 금 자고요, ‘풍’자는 ‘풍년 풍’자랍니다.” 식품공학 전공, 마케팅 업무 경력 등으로 무장한 양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술을 빚는 일이었다. 강화도 쌀로 빚은 ‘금풍양조’(6.9도, 7500원), ‘금학탁주 블랙’(9.6도, 2만8천원), ‘금학탁주 골드’(13도, 3만3천원), 인삼 향이 가득한 ‘금학탁주 그린’(9.6도, 3만3천원) 등이 생산된다. 여기엔 신기한 막걸리 키트도 있다. ‘금풍 컵막’(Geumpung CupMak)은 컵라면 용기처럼 보이는데, 여기에 양조장에서 만든 각종 재료를 넣으면 단박에 술이 완성된다. 그가 양조뿐만 아니라 심혈을 기울인 일은 또 있었다. ‘체험 공간’으로 양조장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일이었다.
이날 그가 2층으로 안내했다. 문짝엔 2층 공간을 즐기는 다섯 가지 방법인 ‘술레길 5코스’가 적혀있었다. 양조장을 ‘보고’(시각), 술항아리에 소원을 말하면서 울림을 듣고(청각), ‘금풍양초’의 향을 맡고(후각), ‘길상’(吉祥·운수가 좋을 조짐) 기둥을 만지고(촉각), 막걸리 맛(미각)을 보는 과정이었다. 2층에 오르자, 100년 남짓 이 공간을 오간 이들의 희로애락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 뼈대, 삐걱거리는 목조 바닥, 낡은 술 항아리, 복원 예정인 술병 등이 여행객들을 단박에 과거로 보내버렸다.
양 대표가 바닥에 뚫린 직사각형 구멍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궁금하지 않으냐’면서 말이다. 구멍은 지옥문처럼 보였다. 과거 균 보관실로 쓰인 데라고 했다. 그가 낡은 기둥 하나도 가리켰다. 기둥엔 뾰족한 칼로 긁어 적은 한자 몇 개가 보였다. 양 대표는 그중 두 글자를 지목했다. “‘길상’이란 이 글자는 과거 양조장 일꾼들이 ‘좋은 운’을 염원하며 새긴 것”이라고 했다. “손바닥 활짝 펴서 만지면 운이 좋아집니다.” 농담 반 진담 반 소리는 효과가 있었다. 최다니엘도 다가가 손바닥을 폈다. 지난해 오티티(OTT) 넷플릭스 화제작 ‘마스크걸’에서 스토리의 생동감을 살린 조연(주인공 ‘모미’가 짝사랑한 박기훈 부장 역)으로 출연했던 그에게도 언제 론칭할지 모르는 ‘신작’의 운은 필요한 터다. 그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건물에 압도당했고, 대도시 새 건물도 좋지만 고유의 것이 남아있는 옛 건물의 가치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풍양조장이 강화도의 신화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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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리성당은 팔작지붕 한옥성당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의 저자 구본준(1969~2014)씨는 건축과 친해지는 제일 빠른 길이 ‘종교건축’을 둘러보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건축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분야이고, 가장 많은 노력과 돈을 들여 가장 정성껏 짓는 건축물’이 종교건축이라고도 했다. 강화도 남쪽엔 ‘동검도 채플갤러리’와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이 있다. 이 둘은 같은 종교건축물이지만 차이가 크다.
전자는 강화도 남쪽 작은 섬 동검도에 있다. 이 섬에 2022년 문 연 ‘동검도 채플갤러리’는 23㎡(7평) 정도 크기의 작은 성당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명상용 싱잉볼 등을 구비해 둔 작은 성당은 은퇴한 가톨릭 신부이자 스테인드글라스 작가로 이름 날린 조광호 신부가 누구나 명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고 만든 ‘영혼의 쉼터’다. 성당에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로 수놓은 창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신의 소리처럼 느껴진다. 차분해지는 찰나, 숙연한 반성이 몰려온다. 이날 만난 조광호 신부는 “현대인들은 5분을 앉아있지 못하는데, 수많은 번뇌가 가만두지 않기 때문”이라며 “싱잉볼을 ‘띵’ 치고 그 소리를 따라가 보면 스스로 성찰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시장엔 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전시돼 있다.
한편,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은 1906년 지은 한옥성당이다. 낯선 서양 건물인 성당이지만 한옥이라서 친근함이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한옥의 정체성은 지붕 모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수리성당은 팔작지붕이 특징인 팔작집으로, 정면 3칸, 측면 9칸으로 돼 있다. 1891년 한국에 들어와 서울과 강화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마가(1862~1930·본명 마크 트롤로프) 신부가 건립에 힘쓴 우리나라 초기 교회 건물이다. 조마가 신부는 서울대성당 건립도 진두지휘했는데, 매우 꼼꼼한 성격이었던 그가 완성한 대성당은 유럽 여행에서 흔히 만나는 뾰족한 건물이 아니다. 뭉뚝한 지붕에서 신의 평화가 우리 땅에 안착하길 바란 조마가 신부의 기원이 느껴진다. 그가 만든 온수리성당도 볼수록 안온함이 전해진다. 한옥성당 옆에는 2004년 지은 새 성당이 있다. 최다니엘은 “종교적인 느낌보다는 예술로써 건물의 가치가 충분하고, 문화적 가치도 뛰어난 건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강화도 건축 여행의 결말은 간명하다. ‘나를 담을 집’은 어디에 있는가.
강화도/글·사진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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