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스포츠가 하나 된 순간
스포츠 이벤트와 축하 공연을 케이크와 체리의 관계에 비유하면 어떨까? 체리 같은 토핑이 없어도 케이크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지만, 왠지 허전하다. 미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인 슈퍼볼(미식축구 결승전) 하프타임 공연은 본경기 못지않은 화제가 된 지 오래고, 지구촌 축제인 월드컵 개막식에도 무대가 마련되는데 지난번엔 정국(BTS)의 공연이 펼쳐졌다.
올림픽 개막식은 훨씬 더 다채롭고 화려하다. 개최국의 역사와 문화를 녹여내는 동시에 전세계를 아우르는 시대정신까지 담아내는, 아마도 가장 거대한 규모의 종합예술일 것이다. 곧 2024 파리올림픽이 막을 내린다는 아쉬움도 달랠 겸, 역대 최고의 올림픽 개막식이 언제였는지 가려보기로 한다.
애국심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1988 서울올림픽과 영상을 찾기 힘든 시대를 제외하면, 동메달은 1984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주고 싶다. ‘죠스’ ‘슈퍼맨’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 ‘쉰들러 리스트’ 등 영화의 음악감독 존 윌리엄스가 만든 주제곡 ‘올림픽 팡파르’는 베토벤이나 바그너 같은 고전음악 거장의 숨결을 전해준다. 아직도 심심찮게 방송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쓰일 정도로 생명력도 대단하다. 거기에다 제트팩을 멘 로켓맨이 슈퍼맨처럼 경기장 상공을 날아다니던 장면은 당시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은메달은 2008 베이징올림픽 차지다. 1980년대만 해도 덩치만 크고 살림은 빈곤한 공산주의 국가였던 중국이 미국의 맞상대로 급부상했음을 전세계에 과시한 쇼케이스였다. 이때부터 중국과 미국의 자존심 대결도 엿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개막식 시작을 자기들이 좋아하는 ‘8’이 많이 들어간 2008년 8월8일 오후 8시8분8초로 고집했고, 미국은 굳이 중국대표단보다 몇명 더 많은 선수단을 보내 최다 인원 참가국 자리를 지켰다.
우리나라에도 팬이 많은 영화감독 장이머우(장예모)가 총감독을 맡아 예술적 역량을 쏟아부었고, 중국 당국은 막강한 자본과 기술로 장 감독의 꿈같은 연출을 현실화시켰다. 당시 방송단 일원으로 현장에 가서 직접 경험했던 올림픽이기도 한데, 경기장을 가득 메웠던 엘이디(LED) 북 공연이나 베이징시 전역을 수놓은 수만 발의 불꽃놀이는 압도적인 볼거리였다.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가 허공을 질주해 성화대에 불을 붙이는 장면도 대단했다. 다만, 세라 브라이트먼과 중국 가수 류환이 함께 부른 주제곡 ‘유 앤드 미’는 별 감흥이 없었다.
금메달의 주인공은 2012 런던올림픽이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준비 단계에서부터 걱정이 많았다는 당시 영국 각료회의 내용도 남아 있다. 재무부 장관이 개막·폐막식 비용을 베이징올림픽 절반 정도로 잡았다고 하자 총리가 직접 나서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상관없으니 전세계가 깜짝 놀랄 개막식을 준비하라”고 발언한 기록이 있다. 결국 베이징올림픽과 비슷한 규모의 예산이 편성되었고 장이머우 못지않은 명감독 대니 보일이 개회식 연출을 맡아 거대하고 환상적인 뮤지컬을 탄생시켰다.
1막에서는 산업화 이전 영국의 모습을 담고, 2막에서는 산업혁명 시기, 3막에서는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영국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셰익스피어부터 비틀스, 해리 포터까지 등장하는 공연을 보다 보면 우리는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아, 우리가 누리는 문명과 문화의 상당 부분이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시작되었구나. 하지만 이 공연을 최고로 꼽는 진짜 이유는 자기과시가 아닌 자기반성에 있다. 산업혁명 시기의 영국을 보여주는 공연에서 굴뚝에 매달린 소년이나 부품 취급을 받는 노동자들을 드러냄으로써 번영의 그늘도 있음을 시인한 것이다. 다른 올림픽 개막식에서 찾기 힘든 덕목이다.
이번 파리올림픽 개막식은 영 내 취향이 아니었다. 다만 셀린 디옹의 무대만큼은 역대 올림픽 축하 공연 중 가장 감동적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굳어가는 희소병에 걸려 17년째 투병 중인 그가 개막식 공연을 제안받았다는 뉴스를 몇달 전에 접했을 때, 그의 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던 나는 성사되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틀렸고 에펠탑 한가운데 기적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파리올림픽을 위해 그가 선택한 노래는 에디트 피아프 원곡인 ‘사랑의 찬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괜찮아요/ … / 당신이 나를 원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요”
아름다운 사랑 노래가 응원가로 바뀌어 파리 상공에 울려 퍼지던 그 순간, 음악과 스포츠는 하나가 되었다. 아직 못 보신 분들은 꼭 찾아보시길. 병마와의 대결에서 전율의 한판승을 거둔 셀린 디옹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 싶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한동훈 ‘김경수 복권’ 반대…용산 “대통령 고유 권한”
- ‘권익위 국장과의 대화’ 공개한 이지문 “권익위 독립성 단초 돼야”
- ‘남 임애지-북 방철미’ 속내…일본 기자가 대신 묻는 아이러니 [봉주르 프리주]
- 일본 홋카이도 해상서 규모 6.8 지진…“쓰나미 위험 없어”
- 태안 80대 열사병으로 숨져…온열질환 사망자 20명 넘을 듯
- ‘아프간 여성에 자유를’ 망토 펼친 난민대표 실격…“그래도 자랑스럽다”
- ‘김건희 명품백 조사’ 권익위 국장의 비극…법치가 무너졌다 [논썰]
- 12년 만에 런던 ‘동’ 되찾은 역도 전상균…에펠탑 앞에서 ‘번쩍’
- 1조원 증발 티메프, 신뢰 붕괴 딛고 ‘회생’ 가능할까
- 김정은, 국제사회 지원 거부…“수재민 1만5천명 평양서 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