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벤츠에 ‘아파트 쑥대밭’…전기차 화재, 숨어있는 진짜 범인은 [세상만車]
전조현상 무시하다 뒷북쳤다
신도 악마도 ‘디테일’에 있다
폼나는 혁신보다 ‘안전’ 먼저
전조현상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입니다. 낭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증명됐습니다.
기압이 낮아지고 습도가 높아져 비가 내릴 조짐을 보이면 벌레들의 날개에 물방울이 맺혀 날기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지면 가까이 내려오겠죠. 제비는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 덩달아 낮게 날게 됩니다.
전조현상은 재해의 위험성을 분석할 때 사용하는 ‘하인리히 법칙’과 관련 있습니다.
대형 사고는 우연히 또는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게 아니라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나 조짐이 있었다는 법칙입니다.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전조현상 같은 징후나 조짐이 나타나고 사소하게 보이는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면 크고작은 사고를 예방할 수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위기에는 전조현상처럼 조짐이 있습니다. 큰 위기가 발생하기 전 작은 위기들도 찾아옵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거나 무시하다가 진짜 돌이킬 수 없는 큰 위기가 발생합니다.
이번 전기차 화재도 처음이 아닙니다. 피해가 워낙 커서 주목받았을 뿐 이미 전조현상과 사고가 수차례 나타났습니다.
화재건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방청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전국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는 총 160건입니다.
연도별 화재 건수는 2018년 3건에서 2019년 7건, 2020년 11건, 2021년 24건, 2022년 43건, 2023년 72건으로 늘었습니다.
다중이용시설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는 2018년 0건에서 지난해 10건으로 증가했습니다.
화재 발생 건수만으로 분석해보면 내연기관차보다는 전기차에서 화재가 적게 발생했습니다.
소방청과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지난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3년 간 내연기관차 화재는 총 1만933건으로 집계됐습니다.
지난해 기준 1만대당 화재 건수는 내연기관차가 1.9건, 전기차는 1.3건이었습니다.
불이 난 전기차는 ‘용광로’처럼 뜨거워집니다. 1000도까지 올라가고 끄기도 어렵습니다.
분말소화기를 사용하더라도 소화 분말이 리튬배터리 내부에 미치지 못하고 냉각 효과도 거의 없죠.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불이 난 아파트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경비원과 주민들이 소화기로 초기 진화에 나섰으나 실패했다는 목격담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전기차 화재에 대비해 지난해 10월 도입한 ‘이동식 수조’도 투입하지 못했습니다.
이동식 수조는 전기차 주변에 물막이판을 설치해 배터리 높이까지 물을 채워 화재를 진압하는 장비입니다.
소방대원들이 수조를 직접 불이 난 전기차 근처로 옮겨야 하지만, 자욱한 연기로 불이 난 곳까지 접근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하 공간 내 전기차 화재는 큰 피해를 야기하지만, 전기차 주차나 충전소 설치 관련 기준이나 규제는 아예 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아파트에는 총 14개동에 1581세대가 거주합니다. 화재 직후 검은 연기가 지하주차장은 물론 아파트 단지를 뒤덮으며 주민 103명이 대피했습니다. 106명은 계단과 베란다를 통해 구조됐습니다.
연기를 흡입해 병원으로 옮겨진 주민들도 많았습니다. 이 중에는 1살·4살 등 영유아와 어린이 등 10살 이하 7명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불이 난 차량 주변으로 연소가 확대되며 주차장에 있던 차량 72대가 전소되는 등 총 140여대가 피해를 봤습니다.
지하 설비나 배관 등이 녹아 수돗물 공급이 중단됐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화재 연기와 분진 피해를 입은 가구도 많습니다.
8시간 넘게 지속된 고열의 화재로 콘트리트와 철근 등이 손상됐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손해보험업계가 추산한 피해금액은 100억원 가량입니다.
수도권 아파트 곳곳에서 전기차 지하주차장 출입금지 조치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경기 안양시의 한 아파트 단지의 경우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의결을 통해 전기차 화재 때 민형사상 책임을 차주가 진다는 서약서를 내야 지하주차장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안전성이 확보될 때까지 지하주차장 전기차 충전소를 폐쇄하거나 출입을 금지시키는 기업들도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전기차 화재로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죠.
주차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강제 퇴장 조치까지 나오자 전기차 차주들은 “한순간에 전기차 타는 죄인이 됐다”고 항변합니다.
이번에 불이 난 벤츠 EQE와 같은 차종을 구입한 차주들은 1억원을 주고 샀는데 주변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 통계에 따르면 2022년부터 올해 6월까지 판매된 벤츠 EQE는 5461대에 달합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안전성이 입증될 때까지 지하주차장 출입을 금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강한 편입니다.
전기차 회사들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전기차 공포증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정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아파트 쑥대밭 화재로 이제는 전기차 시장이 쑥대밭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자동차시민연합(대표 임기상)에 따르면 해외에서도 전기차의 지상 주차장 이용을 권고하는 곳이 많습니다.
미국 코네티컷주 밀포드 시는 올해 초 전기차 충전소를 지하주차장에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례를 통과시켰습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소방구조청은 전기차 주차·충전을 가능하면 야외에서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의 지하주차장 주차를 금지한 사례가 있습니다. 쿨름바흐와 레온베르크는 지하주차장 전기차 주차 금지 규정을 도입했습니다.
이번 인천 전기차 화재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상은 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가 ‘혁신’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키면서 급해진 기존 자동차회사들이 예상보다 일찍 ‘따라하기’에 나섰습니다.
혁신보다 품질·안전이 우선인데 ‘전기차 대세론’에 휩쓸려 “우리가 만든 차는 괜찮을 거야”, “한두번 불났을 뿐인데, 설마”라며 방심했습니다.
전기차를 ‘달리는 스마트폰’으로 만드는 혁신에 공들이다 보니 전조증상과 화재 사고를 무시하고 시간이 걸리는 안전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결국 전기차는 탑승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해치는 ‘달리는 흉기’라는 오명을 쓰게 됐습니다.
대형사고가 1건 터졌을 때 이미 원인이 같은 경미한 사고가 29건,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징후가 300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번 인천 전기차 화재는 ‘1’에 해당할까요, ‘29’에 속할까요. ‘1’이 된다면 불행 중 다행입니다만, 땜질 식 처방에 나선다면 ‘더 큰 1’이 터지게 만들 ‘29’가 될 겁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고 사소한 문제라며 무시하다가 일을 망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천 전기차 화재도 따져보면 디테일에 숨어있던 악마가 저질렀습니다. 벤츠 전기차 화재를 ‘남의 일(1)’이라며 무시하다가는 다음 차례는 테슬라, BMW, 아우디, 포르쉐, 현대차, 기아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디테일에 공들이면 악마가 아닌 신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명작·명품·명차는 디테일에 숨어있는 신을 찾아야 탄생할 수 있습니다. 문제 해결책도 디테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기차가 진정 대세가 되려면, 캐즘의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지금이라도 디테일에 숨어 있는 신과 악마를 찾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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