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과 공동체가 있는 삶, 도시는 더 작아져야 산다[허남설 기자의 집동네땅]
이번 파리 올림픽 내내 에어컨을 두고 말이 많았다. 에어컨 없는 선수촌에서 잇따라 탈출한 선수들은 경기장을 오가는 버스에서도 ‘노(No) 에어컨’에 시달렸다. 파리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한발 양보해 에어컨 2500대를 선수촌에 제공했는데, 대신 사용하려면 요금을 내라고 했다. 조직위는 기후위기를 내세우며 한여름 올림픽을 이렇게 운영했고, 그 의도와 상관없이 폭염을 피하는 데 돈이 들게 만들어 부국과 빈국 사이 격차만 더 벌린 것 아니냐고 비판받았다. 탄소를 실컷 배출해 발전한 선진국이 이제 와서 후진국·개발도상국에 엄격한 재생에너지 기준을 들이대며 갈등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런 모순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에 경각심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거칠고 꽉 막힌 운영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겠으나, 올림픽이란 국제무대를 배경 삼아 기후 의제를 부각한 효과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강단이다. 냉방 기술이라면 오직 에어컨만 떠올리게 길든 우리가 보지 못한 측면도 있다. 프랑스가 선수촌 건물을 지을 때 그랬듯 심미안만 좇지 말고 단열에 강한 재료를 우선 취하거나, 밀도(용적률)에 대한 욕망을 약간 덜어내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충분히 넓은 바람길을 조성하면 자연 냉방 효과를 키울 수 있다. 파리의 ‘도시 냉방 네트워크’에도 주목해야 한다. 센강의 물을 지하로 끌어들이고 건물 전체로 순환시켜 온도를 낮추는 기술이다. 선수촌에서도 이 같은 냉방 장치로 실내 온도를 기온보다 6도 낮추는 효과를 냈다. 파리엔 현재 루브르 박물관을 포함해 100㎞가 넘는 냉방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개별 건물 냉방보다 효율적이어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50%가량 줄였다고 한다.
파리의 ‘노 에어컨’ 논란됐지만
경기장 건설·배치·보행 동선 등
기후 문제에 대한 철학 엿보여
‘15분 도시’ 개념, 한국선 왜곡
압축·재생 빠지고 토목·건설뿐
‘친환경’ 고민 없인 갈 길 멀어
파리 올림픽을 ‘친환경 올림픽’으로 만든 건 냉방 수단만이 아니다. 경기장 건설과 배치, 대중교통과 보행·자전거 위주 이동 등 곳곳에 기후 문제를 의식한 흔적이 나타난다. 여기엔 파리시가 2020년부터 추구한 도시 운영 철학이 깃들어 있다. 바로 ‘15분 도시’다. 안 이달고 파리시장이 이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그해 재선에 성공했다. 한국에서도 부산과 제주를 비롯해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15분 도시를 추진하거나 연구 중이다. 하지만, 그중에선 15분 도시를 지독하게 오독한 경우가 적지 않다. 15분 도시의 축소판과도 같았던 파리 올림픽은 국내 15분 도시의 방향성을 반추하게 한다.
15분 도시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는 15분 도시를 ‘15분 내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도시’ 따위로 단순하게 소개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같은 정의는 교통체증에 시달리지 않고 빠르게 내달릴 수 있는 도로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실제로 박형준 부산시장은 2021년 보궐선거 당시 15분 도시 조성을 공약으로 걸면서, 가덕도 신공항에서 기장군까지 50㎞를 15분 안에 주파하는 초고속 열차 ‘어반루프’ 도입을 함께 약속했다.
하지만, ‘15분’이란 시간을 잴 때 상정한 이동수단은 보행과 자전거란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15분 도시는 기후위기를 염두에 둔 개념으로, 탄소배출을 철저히 배격하기 때문이다. 이달고 시장에게 15분 도시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카를로스 모레노란 학자가 있다. 그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15분 내 주거·직장·소비·의료·교육·문화 등 6가지 기능에 닿을 수 있는 도시가 이상적이라고 봤다. 부산 센텀시티와 영도를 빠르게 잇는 새로운 도로를 낼 게 아니라, 센텀시티와 영도 모두 그 안에서 6가지 기능을 충족하게끔 지역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파리시가 이번 올림픽에서 비록 15분이란 조건을 충족하지는 못했지만, 대부분 경기장을 반경 10㎞ 내, 30분 거리에 배치한 것이나 이를 대중교통과 걷기 좋은 녹지축으로 이으려고 한 것은 모두 15분 도시에 바탕을 둔다.
물론, 도시 재구성이란 말이야 쉽지, 현실에선 동네에 학교·스포츠클럽·공연장 등 어느 하나 유치하기 만만한 게 없다. 과밀한 도시에서 빈 땅을 찾기가 힘들뿐더러, 그런 땅이 존재한다고 해도 다양한 주민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15분 도시에서 ‘재생’과 ‘복합’이 핵심 전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파리 올림픽은 시간적으로 프로그램을 촘촘하게 배치하거나, 공간적으로 유휴 공간에 다른 기능을 삽입하면 기존 자산만으로도 수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을 시연했다. 탄소배출을 유발하는 경기장 신축을 최소화하려고 경기장의 95%는 라데팡스 아레나 등 기존 시설을 이용했다. 양궁 대회가 열린 레쟁발리드 등 문화유산을 활용한 경기장엔 물론 선전의 목적도 있지만, 남는 공간의 효용을 최대한 끌어올린다는 의도 또한 담겼다.
모레노는 밤에만 활기가 넘치는 무도회장을 낮에는 체육관으로 전환하거나, 영화관은 관람객이 적은 시간대에 학생들을 위한 시청각 학습 장소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발상은 다소 엉뚱해 보이지만, 과연 우리가 현재 보유한 자산을 100% 활용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일부 지자체가 상업·문화 시설 건설이나 도로 개통 등 새로운 토건 사업의 명분으로 15분 도시를 끌어들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15분 도시가 주목하는 건 ‘학교’다. 저출생 시대에 학교는 문제적 시설이다. 골칫거리로 전락한 학교가 적지 않다. 올해 신입생을 한 명도 받지 못한 초등학교가 전국 157곳에 이른다. 1990년대 신도시였던 분당의 학생 수도 17년 후엔 반토막이 난다. 폐교는 이제 지방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도 속출할 것이다. 굳이 이런 사실과 전망을 들지 않아도 학교를 100% 활용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들 만하다. 초등학교는 오후 3~4시만 되면 텅텅 빈다. 하교 이후와 주말엔 아무도 쓰지 않는 장소다. 그래서 파리시는 학교 운동장을 주민이 함께 쓰는 공원으로 바꾸는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131개 학교에서 시행했다. 녹지로 바뀐 운동장은 기후변화 시대 적응력을 키우고 때로는 피난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오아시스로 작동한다.
파리 올림픽을 계기로 15분 도시 이야기를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파리가 15분 도시의 원조인 건 아니다. 미국 포틀랜드가 파리보다 10년 앞서 ‘20분 동네(Neighborhoods)’를 계획했으며, 놀랍게도 한국에선 2012년 서울시가 ‘10분 동네’란 정책을 편 적 있다. 스웨덴에선 ‘1분 도시’란 모델도 나왔다. 중요한 건 원조 논쟁도 아니고 ‘10분’ ‘20분’ 같은 단위도 아니다. 파리의 15분 도시를 교조적으로 따를 이유도 없다. 모레노도 “15분 도시는 마법사의 지팡이가 아니다”라고 했다. 지켜야 할 건 기후변화 대응이란 본질이다.
문제는 부산과 제주 등 지자체들이 모두 ‘15분 도시’ 이름까지 그대로 따라 하면서도, 기후 문제를 겨냥한 친환경과 재생 등 방법론은 얼마나 채택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가령, 주민들이 즐겨 찾는 체육공원을 철거하고 아파트를 짓겠다는 부산 구덕운동장 재개발 사업이 그렇다. 제주에서는 최근 도로를 넓힌다면서 오래된 가로수를 베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무엇보다 부산과 제주 모두 탄소를 엄청나게 배출할 신공항 건설에 목을 맨다.
15분 도시를 그저 물리적 환경의 개조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다. 도시를 인구밀도나 용적률 등 면적이 아닌 시간에 기반한 잣대로 평가하는 의미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여기엔 15분 안에 모든 도시적 생활을 누리게 만들어 남는 시간을 자신과 가족, 그리고 주변 공동체를 돌보는 데 쓰자는 뜻이 있다. 말하자면 ‘저녁이 있는 삶’이다. 장시간 출퇴근과 장시간 노동 등을 건드리지 않고는 15분 도시를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의 15분 도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허남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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