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꽃밭은 무엇인가요?…“그 빈틈이 우리를 구해요”

김규남 기자 2024. 8. 1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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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고각성 사회의 자기돌봄
마음과 삶의 균형 잃은 한국 사회
‘쓸모없는 시간’ 나에게 선물 필요
페르소나-자기 균형, 지속가능 힘
생각 끊는 도구, 자기합리화 도움
책 ‘빈틈의 위로’의 공저자인 (왼쪽부터) 김태술 전 프로농구선수, 강다솜 문화방송 아나운서, 서미란 문화방송 라디오 피디,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적게 자고 많이 일하지만, 삶의 만족도는 낮고 자살률은 높다.’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2021년 한국인의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51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8시간28분)을 37분 밑돌며 오이시디 최하위 수준이었다. 또 한국인의 노동시간은 2022년 1904시간으로 오이시디 평균(1719시간)보다 185시간 많다. 반면,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2020~2022년 평균 6점(10점 만점)으로 오이시디 평균(6.7점)보다 낮은 하위권에 속한다. 또 한국의 자살률은 2020년 인구 10만명당 24.1명으로 오이시디 평균(10.7명)의 두배가 넘는다. 이는 2020년 오이시디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한국은 리투아니아와 함께 10년 넘게 오이시디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률을 유지하고 있다.(오이시디 자료와 통계청 ‘국민 삶의 질 2023’ 보고서)

정신과 의사는 이러한 ‘사회의 우울’을 최일선에서 만나는 목격자다. 정신과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정신과 의사들이 2017년부터 운영해온 유튜브 ‘뇌부자들’의 진행자이자, 2020년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더욱 얼굴을 알린 김지용(41)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쉴 틈 없이 달리기만 하는 이들에게 다가서는 ‘빈틈의 위로’라는 책을 내놨다. 그는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보다 훨씬 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에서 시작되는 변화가 결국 내 삶에 ‘숨 쉴 틈’을 만들어낸다”며 “지금보다 당신은 더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우리 마음속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인조’가 자리잡고 전투를 벌인다고 한다. ‘페르소나’(persona)와 ‘자기’(self)다. 자아(ego)가 자기의 목소리를 들으면 삶의 변화가 시작되지만, 이를 그냥 두지 않고 페르소나가 거세게 반격한다. 우리 삶은 투쟁하는 페르소나와 자기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의 개념에 근거한 설명이다.

이 책에는 공저자들이 있다. 김지용 전문의가 책에서 “노력과 성취와 우울의 과정을 거친 뒤 인생의 두번째 챕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글을 부탁했다”고 소개한 강다솜(38) 문화방송(MBC) 아나운서, 서미란(42) 문화방송 라디오 피디, 김태술(40) 전 프로농구선수가 그들이다. 공저자 겸 핵심 사례자들인 셈이다. 지난 5일 폭염을 뚫고 온 이 책의 지은이 4명과 함께 한겨레신문사 4층 회의실에서 ‘빈틈의 위로’에 대한 좌담회를 열었다.

‘자신만의 꽃밭’이 우리를 구한다

지난 5일 한겨레신문사 4층 회의실에서 ‘빈틈의 위로’ 공저자들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우선 페르소나와 자기 개념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달라.

김지용 ‘페르소나’는 자아의 가면을 뜻한다.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내가 자라온 가정이나 사회에서 나한테 요구하는 모습이 페르소나다. ‘자기’는 내가 원하는 것을 뜻한다. 나를 위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찾는 등 나의 가장 근원적인 힘이다. 페르소나와 자기는 모든 상황에서 부딪힌다. 예를 들어 내 진료실의 예약이 꽉 차 있는데 한 예약자가 안 오고 연락도 안 받는다면, 내 마음속에서 동시에 여러가지 마음이 생긴다. ‘아, 이분이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 지난번 진료 때 무슨 얘기를 나눴지, 혹시 어떤 사인은 없었나’ 등의 마음은 의사로서의 페르소나가 이분을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빈 시간이 생겨 조금 숨 돌릴 틈이 생겼다’는 ‘자기’의 마음도 든다. 둘 다 내 마음이니 인정을 해줘야 하는데 만약 후자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의사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스스로를 비난하면 힘들어진다. 페르소나와 자기는 균형이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인은 적게 자고 많이 일하지만, 삶의 만족도는 낮고 자살률은 높다. 왜 이렇게 마음과 삶의 균형을 잃은 채 살고 있을까.

김지용 우리는 페르소나가 집단 속에 너무 강하게 묻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바라니까 공부하고, 의대 가고, 법대 가고, 또 사회가 바라니까 대기업 가고 하지 않나. 어릴 때부터 그렇게 끌려다니며 사는 경향이 있다. 또 사회 분위기가 경직돼 있는 것 같다. 기업 강연을 가 보면 한국계 기업과 외국계 기업 분위기가 신기할 정도로 너무 다르다. 외국계 기업은 놀이터처럼 환경이 꾸며져 있는 곳도 있고, 질문도 편하게 주고받곤 한다. 그런데 한국계 기업은 다들 학교에서 수업 듣는 것처럼 들으며 앉아서 조는 사람도 있고, 질문도 많이 안 하는 편이다. 또 우리 사회를 ‘고각성 사회’라고 이르기도 한다. 진료실에서 진짜 많이 듣는 얘기가 ‘머리가 쉬지 못한다’이기도 하고. 항상 각성돼 있고,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각성이 풀어진 상태는 잘못된 상태라고 여긴다.

강다솜 문화방송 아나운서. 윤운식 기자

빈틈의 위로가 필요했던 공저자이자 핵심 사례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강다솜 아나운서는 입사 초기 “매일 뺨을 맞는 기분”이었다. ‘아끼는 후배니까 얘기해주는 것’이라는 말로 포장된 회사 선배들의 폭언에 여러번 마음이 무너졌다. 요일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업무 연락이 왔다. 마음도 몸도 무거워졌다. 회사에서는 화장실, 집에서는 책상 밑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아나운서 페르소나가 자신의 안팎에서 늘 압박해왔다. 큰 위궤양이 생겼고, 에너지도 방전돼 집에서는 주로 누워 있었다. 김지용 전문의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감정을 감추고 가면을 쓰고 살아야겠지만, 이 페르소나라는 가면이 지나치게 커지면 우울증을 겪을 위험이 올라간다”고 했다. 3년가량이 흘렀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지인들이 플라멩코, 네일아트, 아이돌 덕질 등 “자신만의 꽃밭”을 가꾸고 있었다. 그는 ‘쓸모없어도 된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나에게 선물해주자’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관에 갈 힘은 없어 집에서 봤다. ‘대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유명한 고전부터 보기 시작했다. 2년 새 300편쯤 봤다. 이후엔 사진 찍기·편집 취미도 생겼다. 오는 9월엔 사진전도 열 계획이다. 삶에 빈틈이 생기자 그는 “신기하게도 왠지 힘이 생긴 것 같았다. 나에 대한 희망이, 믿음이 움트고 있었다”고 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그렇게 자신만의 꽃밭을 가꾸는 순간이, 그 빈틈이 우리를 구한다”고 말했다.

천재 가드로 주목받았으나

서미란 문화방송 라디오 피디. 윤운식 기자

서미란 피디는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난치병을 지니고 태어났다.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수없이 골절이 이어졌고, 초등학교 입학 뒤에는 아예 학교를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골절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9살부터 13살까지 집에서 깁스를 한 채 누워서 또는 엎드려서 지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친구였다. 의사들은 “사춘기만 넘기면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중학생 때 하굣길이나 사생대회에 자신을 보호하려고 엄마가 찾아오면 싫었다. 부모가 보호하려고 하면 더욱 그 보호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중고등학교를 무사히 다니며 졸업했다. 당시 서 피디에겐 “아프다”고 말할 줄 아는 능력이 없었다. 그 말을 꺼내기만 해도 예전의 아픈 상태로 돌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아픈 아이’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20대에 친구들과 오대산에 올랐다가 친구들에게 업혀 내려오기도 했고, 봉사활동차 탄자니아로 첫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취업 면접장에서 “키가 작네요”, “우리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등 쏟아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시선의 벽에 도전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페르소나에 갇히지 않으려고 자기가 더 강해진 예시”라며 “자기 목소리에 충실하게 자기 삶을 확장해 나간 것”이라고 했다.

김태술 전 프로농구선수는 선수 시절, 강동희-이상민-김승현을 이을 천재 가드로 주목받았다. 2007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됐다. 이후 신인왕 수상, 리그 우승 등을 거쳐 2014년 9월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농구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리그에서 두번째로 높은 연봉을 받는 등 승승장구했다. 높은 기대치 속에서 매일매일 발전해야 하는 선수의 삶 자체가 그의 페르소나였고 그가 성장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금메달을 따고 한달 뒤부터 슬럼프가 찾아왔다. “2년 동안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슬럼프란 놈에게 참패했다.” 삶의 힘이었던 아버지의 암 진단과 아버지와의 이별, 새로 옮긴 팀에서 잘해내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감과 책임감 등이 이유였을 것으로 사후에 진단했다.

당시 김태술 선수의 팬이었던 김지용 전문의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슬럼프의 정체가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아픈 사람’이었으나,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치료를 누구도 제안해주지 않았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하는 등 ‘자기’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오직 선수 페르소나가 슬럼프를 극복하도록 계속 스스로를 찔러대도록 했다. 이후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자신을 보듬어주려 노력하는 사람이 됐다. 이후 2021년 은퇴했다. “10년 전 나를 집어삼킨 슬럼프는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이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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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실제와 상상 구분 못 하게 해

김태술 전 프로농구선수. 윤운식 기자

“노력과 성취와 우울의 과정을 거친 뒤 인생의 두번째 챕터를 살고 있는” 이들은 페르소나와 자기의 균형을 강조했다. 그 방법은 빈틈, 자기돌봄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다.

강다솜 지난해에 아이를 낳고 나서 워킹 맘으로 살면서 ‘어너더 레벨’의 삶이 시작됐다. 회사 일과 육아를 하다 보면 내 일은 뒷전이 되기 일쑤다. 하지만 회사 일과 육아를 제대로 하기 위해 나에게 빈틈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한 주간의 스케줄을 쭉 보고 ‘수요일, 보고 싶었던 유튜브 보기/ 목요일, 사진 편집하기’ 등 나만의 꽃밭을 위한 시간을 정식 일정으로 적어놓고 실천한다.

서미란 현재 밤 12시에 끝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4년 넘게 하고 있다. 그 전에도 심야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었는데, 각성되고 긴장된 상태로 퇴근하게 돼 집에서 잠을 잘 못 자 불면증 진단을 받았다. 이후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김주환 연세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의 ‘내면소통’ 유튜브가 유익했고, 지금은 ‘캄’(calm)이라는 유료 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김태술 사실 나만의 꽃밭이 따로 있지는 않다. 굳이 나만의 꽃밭이라고 칭할 대상은 나 자신인 것 같다. 나는 내가 성장할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 것 같다. 사실 ‘빈틈의 위로’ 책 원고를 쓰기로 했을 때도 공저자들 중에서 내가 1등으로 빨리 쓰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선수 때처럼 경쟁을 다시 시작한 건데 내 그런 모습에 스스로도 기가 찼다. 근데 그게 내 삶이었고, 어떻게 보면 그렇게 1등 했다는 게 나에게는 작은 행복일 수 있다.

김지용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인데, 이를 위해 두 가지 기술이 효과가 있다. 하나는 ‘생각을 끊어주는 도구’다. 힘든 생각이 밀려올 때 ‘잠시 잊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일단 한번 끊기고 난 뒤 체급이 작아진 대상을 상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운동과 명상은 긍정적 효과가 확실하게 입증된 도구다. 나도 농구와 명상을 한다. 다른 하나는 자기합리화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합리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과도하지 않은 자기합리화는 필요하다. 자기비난과 자기합리화, 이 둘 사이에 적당한 균형과 긴장이 있어야 삶이 건강해진다.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운식 기자

저자들은 글쓰기도 추천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우리 사회 주요 키워드는 ‘불안’이라고 본다. 불안할 때 우리 뇌는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만 하면 불안을 키우게 되는데, 이를 글로 적으면 내 생각의 실체가 보이고 정리도 되면서 불안 확장에 브레이크가 걸린다”고 했다. 강다솜 아나운서도 “자주 쓰는 방법”이라며 “힘들 때 힘든 생각이 매우 커 보이지만, 종이에 적어보면 그 힘든 것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게 눈에 보이면서 대응할 힘을 얻곤 한다”고 했다.

다만, 저자들이 우리 인생에 파도가 밀려올 때 자기돌봄만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김지용 전문의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자기돌봄·자존감에서 관련 해답을 찾으려 시도했지만 자살률과 정신질환이 점점 증가하면서 자기돌봄이 답이 될 수 없고,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각 나라와 문화의 상황은 다르고 해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자기에게 빈틈을 주는 것이 게을러 보이는 것과 구별이 안 돼 보일 수도 있다. ‘나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나’ 하는 불편감을 견뎌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빈틈의 위로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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