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물리학의 70년 '요새' 최대 가치는 '다양성과 존중'
6월 9일 스위스의 작은 국경 마을 메헝(Meyrin). 화창한 하늘 아래로 펼쳐진 보리밭 사이사이 붉은 양귀비꽃이 흔들렸다.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최첨단 지하 실험실'이 지하 100m에 묻혀있다곤 상상하기 어려운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세른'에 더 가까운 발음으로 부르는 CERN은 70년 전인 1954년 설립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황폐화된 유럽의 물리학계를 쇄신하기 위해 개별 국가에서 하기 힘든 물리학 실험을 진행할 연구소를 세우기로 결의한 것이 발단이었다.
연구소 위치는 중립국인 스위스로 결정됐다. 벨기에, 덴마크, 서독 등 12개 국가로 시작해 현재는 전 세계 80여 개국의 1만7000명(2023년 기준)이 넘는 사람들이 CERN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메헝에 모인 이유는 CERN이 보유한 입자가속기 '거대강입자충돌기(LHC·LargeHadron Collider)' 때문이다. LHC는 말 그대로 입자를 빠르게 가속한 뒤 충돌시키는 장치다. 초전도 자석을 두른 원형 가속기의 둘레는 27km에 달한다(그래서 LHC를 점검하는 공학자들은 자전거를 타고 지하 통로를 다니곤 한다).
가속기가 양성자를 가속하면 최고 13.6테라전자볼트(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질량은 개념상 에너지와 동일하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입자의 질량을 표현할때 전자볼트라는 에너지 단위를 쓴다. 1전자볼트는 전자가 진공에서 1볼트의 정전기 전위로 가속될 때 얻는 에너지다. 테라전자볼트(TeV)는 1조 전자볼트)(TeV)에 달하는 충돌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충돌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입자들이 쏟아져나온다.
그중에 연구자들이 찾으려 하는 혹은 아직 찾지 못한 입자들이 있다. 그 입자의 종류를 파악하는 기계가 검출기다. 이번에 보게 될 검출기는 100명이 넘는 한국인 연구자가 실험에 중추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압축뮤온솔레 노이드(CMS·Compact Muon Solenoid)다.
● 입자 '사냥터'를 찾아 지하 100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실험실, CMS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6월 12일 오후 12시 CMS 건물에 도착했다. 밖에서 본 건물은 교외에 있을 법한 커다란 물 류창고처럼 보였다. 하지만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나지막한 탄성이 절로 나왔다. CERN의 과학자 겸 예술가 마이클 호치 CMS 연구원이 직접 촬영한 CMS 검출기의 모습이 실물 크기로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감탄하자 호치 연구원이 말했다. "아름답죠? 이곳에서 일하다가 기계의 아름다움을 깨달아 CMS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호치 연구원은 이날 CMS 소개를 맡았다.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와 함께 방문한 CMS는 건물 지하에 설치돼 있다. CMS는 ATLAS와 함께 LHC의 대표 검출기다. 이 두 검출기는 '다목적 검출기'로 입자물리학자들은 주로 양성자-양성자 충돌을 통해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다. 2012년 힉스 입자 검출 당시에도 ATLAS와 CMS 연구팀이 각각 독자적으로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
CMS의 특징은 내부에 강력한 전자석인 대형 초전도 솔레노이드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이 전자석이 만드는 자기장은 4T(테슬라)에 달 한다. 주머니에 든 펜이 바지를 찢고 날아가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힘이다. 이 자기장이 검출기 내부의 전하를 띤 입자의 궤적을 구부러뜨린다. 그 궤적이 얼마나 구부러졌는지 계산하면 입자의 종류와 운동량 등을 알 수 있다.
"내려가기 전에 모두 안전모를 착용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자기장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신용카드와 지갑도 여기 두고 가시길 바랍니다. 신용카드가 망가져 버릴지도 몰라요." CMS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기 전 호치 연구원은 모두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기대감에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CERN의 연구자가 아닌 방문객이 LHC를 직접 구경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속기가 가동 중일 때에는 엄청난 자기장이 발생해 접근할 수 없고 가속된 입자들과 충돌로 뿜어져 나오는 입자들은 모두 방사선이라 안전 문제도 생긴다.
LHC를 보기에 가장 좋은 기간은 가속기를 고치고 업그레이드하는 '롱 셧다운(Long Shutdown)'이지만 가장 최근의 롱 셧다운은 2018~2022년 사이 3년 넘게 진행됐다. 롱 셧다운이 아니면 이번처럼 사소한 고장을 수리하기 위해 잠시 동안 검출기 가동을 멈추는 '테크니컬 스탑' 기간을 노릴 수밖에 없다.
● 에펠탑 강철의 1.5배, 거대한 검출기
지하 100m에 도착해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데이터 장치, 전원 장치가 모인 '서비스 캐번'을 지나 도착한 곳엔 고대하던 CMS 검출기가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엄청난 크기였다. 기자가 선 자리에서는 붉은색 뮤온검출기의 껍데기와 푸른색 전원장치만 얼핏 보였다.
그 둘만으로도 검출기의 엄청난 규모가 가늠됐다. 코끼리 앞에 서 있는 개미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웅웅'거리는 기계의 저음, 공조 설비의 바람 소리, '삡'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높은 컴퓨터 소리, 수많은 잡음이 어우러져 사방을 울렸다.
"CMS 검출기는 지름이 15m에 길이는 21m나 됩니다. 무게는 1만 4000t(톤)가량 되는데 보잉 747 비행기 80대의 무게와 비슷합니다. 만드는 데 에펠탑에 들어간 강철의 1.5배가 쓰였죠." 호치 연구원이 설명했다.
CMS는 마치 양파 같은 겹겹의 구조로 만들어 졌다. 검출기 중간에는 서로 반대 방향에서 달려 오는 양성자의 빔이 만나 충돌을 일으키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양성자가 충돌하면 양성자에 들어있는 쿼크와 글루온의 상호작용에 의해 새로운 입자들이 만들어져 사방으로 퍼진다.
이 입자들의 종류를 확인하는 검출 장치들이 양파 껍질처럼 충돌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안쪽에서부터 궤적검출기, 전자기에너지검출기, 강입자에너지검출기, 뮤온검출기가 층층이 쌓여 전자, 광자, 양성자나 중성자 같은 강입자, 뮤온을 검출하고 그 데이터를 컴퓨터로 보낸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쌓이는 데이터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양성자의 빔이 한 차례 교차할 때마다 평균 20~40개의 양성자가 충돌하는데 이런 '사건'이 1초에 대략 10억 번 정도 벌어진다. CMS에서는 초당 600MB(메가바이트)에 달하는 정보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입자가속기를 다루는 물리학자들이 하는 일은 탐정과 비슷하다. 충돌 이후에 만들어진 잔해들을 증거로 입자 충돌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입자가 만들어졌을지 추리하는 것이다. 그 수십억, 수백억 건에 달하는 충돌 속에서 의미 있는 증거를 찾아가며 말이다.
"힉스 입자 발견 소식에 샴페인부터 땄죠!"
혹자는 CMS가 자리 잡은 지하 공간을 중세 시대 성당이 들어오고도 남을 만한 크기라고 표현한다. 어쩌면 CMS는 의미상으로도 성당에 가까운 곳일지 모른다. 성상 대신 검출기가 합창곡 대신 수많은 기계의 잡음이 들려온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이곳은 스위스 제네바 구시가지의 생 피에르 대성당이 500년 전 했던 것 처럼 여전히 '우주의 기본 원리'라는 인간의 가장 깊이 있는 질문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CMS를 지배하는 중심 원리는 '표준모형'이다. 표준모형은 현시점에서 우주의 작동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으로 우주를 구성하는 17개의 기본 입자를 예측한다. 그리고 그 기본 입자 중 마지막까지 발견되지 않던 힉스 입자가 이론적 예측이 발표된 지 무려 48년 만인 2012년 이곳에서 발견됐다.
그렇게 표준모형이 현대 물리학자들의 성서 반열에 오르면서 지하 100m에 자리 잡은 거대한 CMS 검출기는 표준모형의 말씀을 시현해낸 현대의 성소로 거듭났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표준모형의 마지막 말씀인 힉스 입자를 발견한 사람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CERN에서 만난 CMS 대변인 패트리샤 맥브라이드는 12년 전 힉스 입자 발견 당시의 감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CMS의 컴퓨터 인프라를 세팅하는 일을 맡고 있었어요. 새벽 2시에 소식을 듣자마자 동료들과 샴페인을 땄죠. 정말 흥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힉스 입자가 발견된 지 벌써 12년. 여전히 힉스 입자는 CMS를 비롯한 CERN 물리학자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힉스는 유일한 스칼라 입자로써 다른 16개 기본 입자와는 특성이 아주 다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질량이나 다른 입자와의 상호작용 정도 등 힉스의 기본적인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맥브라이드 대변인이 설명했다.
물론 표준모형에서 나오는 다른 입자들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도 CMS의 주요 연구다. "탑쿼크, W, Z입자 등 다양한 기본 입자의 특성을 정확하게 측정하면 표준모형을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표준모형에서 예측하지 못한 특이한 현상도 관측할 겁니다."
● CERN의 기술, 세상을 풍요롭게 하다
창립 70년에 접어든 현재 CERN 부지에는 600개가 넘는 건물이 들어섰다. 건물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느낀 감상은 오래된 이공계 학교 캠퍼스 같다는 것이었다. 닳아버린 나무문을 열고 들어간 건물에는 잡다한 장비들이 복도 여기저기에 쌓여있었다.
칠판을 앞에 두고 이론물리학자들은 깊은 토론 중이었다. '파울리 길' '드 브로이 길' '블로흐 길' 등 건물과 건물을 잇는 길의 이름은 모두 유명한 물리학자의 이름을 땄다. 어디든 물리학의 역사가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20세기 입자물리학의 역사는 입자가속기의 역사였다. 1957년 첫 번째 입자가속기인 둘레 15m의 싱크로사이클로트론(SC)이 가동을 시작한 이래 CERN은 때로는 미국 페르미연구소의 테바트론(Tevatron), 스탠퍼드대의 선형가속기와 경쟁하면서 때로는 더 큰 가속기를 만들어 경쟁자를 앞서나가며 점차 영향력을 넓혀왔다.
"지난 70년간 CERN에서는 힉스 발견을 포함해 세 개의 노벨 물리학상이 나왔습니다. 표준모형의 기본 입자인 W, Z입자를 발견했고 '다중-철사 비례계수기(MWPC)'를 발명해 검출기 분야에도 혁명을 일으켰죠. CERN에 한때 몸담았거나 CERN을 거쳐 간 다른 연구자까지 더하면 노벨상 연구는 훨씬 많을 겁니다."
CERN 7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 중인 루치아노 무사 총괄책임은 CERN의 업적을 노벨상에 빗대 설명했다. 실제로 CERN에서 일했던 존 스튜어트 벨은 1964년 '벨 부등식'을 발표해 양자컴퓨팅 분야를 개척했다. 벨 부등식을 실험한 물리학자 3명은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비단 물리학 업적뿐만 아니다. 물리학을 연구하다 발생한 '사소한 공학 연구'들이 세상을바꿔놓은 경우도 허다하다. 무사 총괄책임이 설명했다. "잘 알려진 사례가 컴퓨터 공학자 팀 버너스리가 만든 '월드 와이드 웹(WWW)'입니다. 원래 WWW은 1989년 버너스리가 전 세계연구실끼리 실험 자료와 연구 결과를 주고받기 쉽게 만든 기술이었습니다." 이후 치열한 토론을 통해 WWW을 특허 등록 없이 무료로 공개하며 인터넷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 외에도 정전식 터치스크린, 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PET) 이미지 개발 등 컴퓨터 공학과 의학을 망라하는 수많은 기술이 CERN에서 탄생해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 70년 동안 이어진 가치, '다양성과 존중'
CERN은 70년 동안 어떻게 수많은 업적을 일궈냈을까. 무사 총괄책임이 중요하게 언급한 가치는 '다양성'이었다.
"전 세계 연구자들이 CERN에서 일합니다. 협업을 위해서는 서로 열린 마음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죠. 저는 이런 다양성이 어떤 종류의 국제 실험에서든 매우 중요하다고 100% 확신합니다."
1954년 전후의 폐허 속에서 12개 유럽 국가의 뜻을 모아 시작했던 CERN은 이제 23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전 지구적' 연구 공동체로 커졌다. 한국도 2006년부터 연구 협정을 맺고 20년 가까이 연구에 참여 중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인도, 브라질 같은 국가들도 CERN 연구에 참여하고 있어요. 과학은 국경을 넘어 통할 수 있는 세계 공통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닷새 동안 점심을 먹으러 들렀던 CERN의 레스토랑 풍경도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백발의 백인, 긴머리를 질끈 동여맨 동양계 남성, LGBT 앨라이 배지를 달고 문신을 한 라틴계 여성까지 다양한 국적과 성별, 인종의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심각한 표정으로 연구 얘기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 웃었다.
서로 제 각각인 수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기본 원리라는 한 질문을 풀기 위해 모인 것이다. 어쩌면 CERN이 70년 동안 일궈낸 가장 중요한 업적은 노벨상이나 WWW 같은 연구보다도 다양성과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국제 협력 연구가 가능함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이라는 공통어로 세계가 소통할 수 있음을 말이다.이제 CERN은 다가올 70년을 준비하고 있다. 과연 1만 7000명의 사람들은 어떻게 물리학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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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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