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그는 왜 오렸나?

도광환 2024. 8.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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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처럼 앙리 마티스(1869~1954) 작품을 보는 일은 색에 반하는 일이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겐 어디에나 꽃이 피어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에게 색은 '꽃'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의 색을 다르게 봐야 하는 작품들이 있다.

그 조화가 예사롭지 않았던 듯, 마티스는 연작으로 '폴리네시아, 하늘'(1946)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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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처럼 앙리 마티스(1869~1954) 작품을 보는 일은 색에 반하는 일이다. 예상치 못한 색의 조화를 구사해 사람들 마음에 색을 더해준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겐 어디에나 꽃이 피어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에게 색은 '꽃'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의 색을 다르게 봐야 하는 작품들이 있다. '절지화(切紙畵)'라고 불리는 말년의 그림들이다. 종이를 잘라 오려 붙였다.

먼저 볼 절지화는 '폴리네시아, 바다'(1946)다. 새와 물고기, 해초들이 넘실거린다. 바다와 하늘이 공존하는 듯하다. 색은 단순하지만 조화롭다. 네모로 구획된 칸들이 '구획'이라기보다는 '섞임'의 느낌마저 든다.

'폴리네시아, 바다' 퐁피두센터 소장

그 조화가 예사롭지 않았던 듯, 마티스는 연작으로 '폴리네시아, 하늘'(1946)도 그렸다. 하늘은 높으며 새들은 자유롭다.

단순한 그림 같지만, 단순하지 않았던 과정이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마티스는 수백 마리 새를 키우며 쉼 없이 관찰했다고 한다. 작품도 196*314cm로 엄청나게 크다. 크기를 상상하며 다시 보니 새의 율동미가 실감 난다.

'폴리네시아, 하늘' 퐁피두센터 소장

이처럼 그는 왜 그리지 않고 오려 붙였을까?

1941년, 죽음 직전까지 가는 큰 수술을 받은 뒤 마티스는 프랑스 니스에 정착했다. 그의 몸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붓을 들 수 없었다. 대신 영감이 솟는 순간마다 가위와 색종이를 잡았다.

불구에 가까웠지만, 그는 중단, 포기, 좌절, 권태에 빠지지 않고 다시 생동했다. 엉성한 듯하지만, 치밀하며 조화를 잃지 않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가 진심으로 추구했던 건 색의 자유가 아니라 혼의 자유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혼이 바다와 하늘 속에서 날고 있다.

절지화로서 더 유명한 작품인 '푸른 누드-2'(1952)를 보면 여성 자세는 사실적이고, 신체 곡선미는 도도하다. '응축됐다'는 표현이 이처럼 적절한 경우도 없다.

'푸른 누드-2' 퐁피두센터 소장

다른 유명 절지화는 '이카로스'(1944)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로스 아버지는 뛰어난 조각가이자 발명가였던 다이달로스다. 크레타섬 미노스 왕 부탁으로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만들었지만, 그도 아들과 함께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이달로스는 이카로스에게 새의 날개를 만들어 주며 너무 높이 날지 말 것을 경고한다. 아버지 경고를 잊은 이카로스는 하늘을 나는 기분에 취해 점점 높이 솟아오르다 추락해 죽는다.

마티스는 이카로스 심장 부위에 붉은 점을 찍었다. 강렬한 색은 마티스 자기 의지를 상징하는 것일까?

'이카로스' 퐁피두센터 소장

1980년대 활약한, 여성만으로 구성된 록 밴드 그룹 '뱅글스(The Bangles)'의 1989년 히트곡 '이터널 프레임(Eternal Flame)'을 들은 적이 있다.

'눈을 감고 네 손을 내게 건네줘/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 어떤 기분인지 알아?/ 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니?/ 혹시 나만 꿈꾸고 있는 건 아니지?/ 영원의 불꽃이 타고 있는 걸까?/ 난 그게 운명일 거라고 믿어/ 내 이름을 불러 줘/ 지루한 내 인생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내리쬐겠지/ 그리고 고통은 줄어들 거야'

음률에 취해 듣던 중 가사를 보자니 마티스 마음과 마티스 절지화가 바로 연상됐다. 마티스가 자기에게 불러주는 노래처럼 들렸다.

작가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내는 일은 결국 작품을 만들 때다. 작가뿐 아니다. 누구나 그렇다. 인간은 무언가 '짓는 일'을 할 때 희열을 느끼기 마련이다. 질이 높고 낮음은 상관없다.

'힘들 때일수록 수동적인 인간이 되지 말고 무엇이라도 짓자'는 명제를 마티스가 가르쳐준다.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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