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도 소화 못 시키는 운명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8. 10.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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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김지녀 시인의 ‘물체주머니의 밤’
어둡고 습한 곳으로 가는 시
내면적 어둠으로 자리한 주체
소화할 수 없고 되새김질하는 운명

물체주머니의 밤

보이는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
내 몸의 절반은 위가 되었다 가끔
헛배를 앓거나
묽어진 울음을 토해냈지만
송곳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내벽의 주름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굶주린 항아리처럼 언제까지나 입을 벌리고 있다

안쪽으로 쑥, 손을 넣어 악수하고
손끝에 닿는 것들을 위무하고 싶은, 밤
나는 만질 때에만 잎이 돋는 나무 조각이거나
따뜻해지는 금속에 가깝다

내 안에 꽉 들어찬 것은 희박하고 건조한 공기

기침을 할 때 튀어나오는 금속성 소리
날카롭게 찢어진 곳에서, 푸드득 날아간 새는 기침의 영혼인가
한 문장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
소멸하는 빛과 밤, 사이에서

나는 되새김질을 반복했다, 반복해도
소화되지 않는 나의 두 입술

사물들의 턱뼈가 더욱 강해진다
밧줄처럼 허공에 매달린 나는 공복이다

김지녀
· 2007년 「세계의 문학」 데뷔
· 편운문학상 등 수상
·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등 다수

「양들의 사회학」, 문학과지성사, 2014.

[사진=펙셀]

김지녀 시인의 「양들의 사회학」은 어둡고 습한 시의 영토를 가지고 있다. 시인이 침잠해가는 곳은 음습한 '밤'이거나 '지하1층'이거나 '북쪽'이다. 시인이 시집에서 철저하리만큼 그런 '영토'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어둡고 습한 시의 정서가 가진 '끌림'이 내면에 풍부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짙고 깊은 음습함을 형상화하기 위해 김지녀가 택한 시적 전략은 짧고 강렬한 언술이다. 표현이 명징한데 내적 의미가 암시적이다. 시인은 길지 않는 시행을 추구하는 동시에 시적 정황에 알맞은 강렬한 시어를 구사해 음습함을 도드라지게 한다. 간명하면서도 매력적인 '끌림'을 동반한 음습한 시의 영토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지녀의 시는 대부분 주체 지향적이다. 시를 읽다 보면 내면적 어둠이 된 주체가 보인다. 어둠이 시에서 철저히 구심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B1' '숨' '모자 위의 모자' '저울과 침묵' '다리가 두 개인 의자' '호두 알 속의 웃음' '불의 맛' '회색눈동자' '선' '빗방울의 꼬리들' '불은, 비가' '하얀 방' '모딜리아니의 화첩' '너는 하나의 사과' 등의 시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지녀가 철저히 주체를 탐구하고 주체의 정서와 상황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예시 작품으로 '물체주머니의 밤'을 살펴보겠다. "보이는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 주체는 "몸의 절반"이 "위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위는 소화의 중심이고 제대로 역할을 수행했을 때 건강한 몸이 된다. 그런데 시 속 주체의 '위'는 "송곳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내벽의 주름들"을 가진 '위'이고, "쉴 새 없이 움직이며/굶주린 항아리처럼 언제까지나 입을 벌리고" 있는 '위'다.

소화시킬 수 없는 주체의 어둠을 죄다 빨아들이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해 시인은 특별한 '위'를 만들었다. 그로 인해 주체는 자신의 어둠이 위 속에 있는 걸 알기에 "안쪽으로 쑥, 손을 넣어 악수하고/손끝에 닿는 것들을 위무하고" 싶어 한다.

위 속에 있는 것은 "만질 때에만 잎이 돋는 나무 조각이거나/따뜻해지는 금속에" 가까운 존재인데 그것이 자신과 가깝다고 시인은 언술한다. 잘 알다시피 나무와 금속은 소화될 수 없는 딱딱한 물질이다. 주체는 결코 소화할 수 없는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해 거시적인(사회적인) '위'가 자신과 맞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자신 안에 들어온 것들을 잘 소화시킬까. 그렇지 않다. 주체는 "한 문장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소멸하는 빛과 밤, 사이에서" "기침을 할 때 튀어나오는 금속성 소리"를 만나거나, "날카롭게 찢어진 곳에서, 푸드득 날아간 새"를 만난다. 소화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인지한다.

주체는 거대한 '위' 안에서 자신을 소화할 수도, 자신 안에 들어온 것을 소화할 수도 없는 운명이기에 자신을 "소화되지 않는" '두 입술'을 가진, "밧줄처럼 허공에 매달린" '공복'이라고 규정했다.

[사진=펙셀]

「양들의 사회학」에서 주체 지향적인 어둠은 강렬하고 감각적이며 매력적이다. '어둡고 습한 시의 영토'가 일반적인 정서에 기반을 두고 형성돼 있지 않고, 개별적 경험 맥락에 의해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지녀의 시가 '어둠'으로만 일관되게 치닫거나 거기에 함몰되진 않는다. 어둠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몇 편의 시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얼어붙었던 생선들이 조용히" 풀리듯, 어둠의 "피가 돌고 눈동자에 물이" 차오르듯 "차가운 진실"('해동')이 해동 중임을 제시한다.

따라서 어둠은 "안개의 뉘앙스"처럼 오묘하고 "썩어 가는 과일의 내부처럼"('모자 위의 모자') 달콤하지만, 그것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김지녀 시에서 어둠은 다양한 문양을 가지고 있고, 그 문양 하나하나가 개별화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그런 개별성은 어둠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더욱더 매력적인 지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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