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할 일을 미루는 나…은밀하게 ‘분노’하는 중입니다 [ESC]
부모의 폭력·방임, 분노의 뿌리
무력감·슬픔 가리려 넉살·침잠
억압된 과거 벗어나 자유로워야
Q. 저는 캥거루족입니다. 대학원 준비도, 취업준비도 해봤는데 아직 뭘 할 지 방향을 못 정했어요. 낙천적이고 압박을 안 느끼는 성격이라 그런지 ‘해보다 안 되면 딴 거 하지’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부모님은 나이 먹고도 급한 기색 없는 저를 답답해 합니다. 며칠 전에 학원 끝나고 택시 타고 집에 들어왔더니 “돈 벌 나이에 아직도 용돈 받아 쓰면서 무슨 생각으로 택시를 타고 다니냐”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학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두 달 전에 부모님이 저를 집으로 불러 들였어요. 공부 열심히 하라고 방 얻어줬더니 맨날 지각이나 한다고요. 학원이 멀어진 것도 힘든데 택시까지 못 타게 하니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철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저는 이 나이까지 제 앞가림 못 하고 부모님 지원으로 공부하는 게 죄송하진 않아요.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맞고 방치된 기억이 많습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운동회에 오신 적이 없어요. 저는 넉살이 좋아 친구네 돗자리에 끼어 앉아 김밥을 얻어먹었지만, 동생에겐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있어요. 엄마는 할머니의 구박과 아빠의 외도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았고, 저와 동생에게 그 분풀이를 했어요. 시험에서 하나라도 틀리면 맞는 건 기본이고, 밥 먹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내도 손등을 맞았고, 만화책 보다 걸려도 맞았어요. 피하면 더한 매질이 시작됐고요. 엄마는 사람을 사서 바람기 많은 아빠를 미행했고, 저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를 욕했어요.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놀라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저는 그렇게 불행하진 않았어요. 아빠가 엄마에게는 별로인 남편이었을지 몰라도 제게는 잘해주셨거든요. 용돈도 많이 주셨고요. 엄마 성격을 아니까 아빠가 바람 피운게 게 이해되기도 했어요. 엄마도 불쌍한 사람이예요. 할머니가 엄마에게 자기 아들 등골 빼먹는다고 험한 말을 많이 했어요. 엄마도 화를 풀 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엄마가 때릴 땐 아팠지만, 덜 아프게 맞는 요령을 터득해서 나중엔 괜찮았어요. 아픈 척하는 할리우드 연기로 엄마를 속이는 쾌감도 있었고요. 안 좋은 일도 금방 잊어버려서 별 상처 없이 큰 것 같아요. 하지만 돈으로 치사하게 구는 엄마, 아빠를 보면 화가 나요. 사랑도 안 줘놓고 돈도 안 주려는 모습을 보니 저를 왜 낳았나 싶어요. 민소정(가명·29)
A. 소정님이 써주신 어렸을 때 경험들을 하나하나 상상해 봤습니다. 운동회 날 점심시간,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달려가는 친구들을 보며 소정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의 매질이 훤히 예측되는 100점을 못 맞은 날에는 하교 길에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릇에 수저 부딪히는 소리도 내면 안 되는 분위기에서 좋아하는 반찬은 편히 드실 수 있었을까? 나를 뜨겁게 응원하는 목소리, 시험을 못 봐 풀 죽어있을 때 건네지는 다정한 위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식사 시간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경험들을 박탈 당한 어린 소정님의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아픕니다.
어쩌면 소정님의 과거에 주목하는 게 사연의 초점을 벗어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과거는 과거고, 부모님의 방임과 폭력이 있었지만 소정님은 상처받지 않았고, 부모님이 경제적인 지원을 줄이려고 하는 ‘현재’가 지금 나를 화나게 하는 문제니까요. 하지만 소정님의 분노는 어제 오늘 생긴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 훨씬 뿌리가 깊어 보입니다.
부모의 폭력과 방임에 상처받지 않는 아이는 없어요. 자신을 가장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할 대상이 자신을 공격할 때 아이는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비참한 기분에 빠집니다. 부모의 외도도 마찬가지예요. 굳건하다고 믿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흔들리면 아이는 유기될지 모른다는 강렬한 불안을 경험합니다. 아버지가 소정님에게 잘해준 순간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폭력으로부터 소정님과 동생을 보호해주지는 못 했어요. 더구나 좋아했던 아버지가 가족을 저버리고 남몰래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줬을 것 같아요. 이런 감정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린 아이로서는 더욱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넉살 좋은 웃음으로 버려졌다는 슬픔을 숨기고, 연기로 엄마를 속여 폭력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끔찍한 무력감을 통제감으로 뒤바꾸고, 부모님의 입장에 이입하며 분노를 차단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소정님의 분노는 마음 속 깊숙이 가라앉게 된 것 같아요.
잊는다고 잊혀지면 좋겠지만 감정은 그렇지가 않아요. 억압된 분노는 처음의 모습과 다르게 변형되어 드러납니다. 그 중 하나가 지연행동, 즉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루는 행동이에요.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망설이고 꾸물거리다 결국 해야 할 일을 제 때 못하는 행동을 분석해보면 분노가 억압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일이 지연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뭔가를 제 때 하지 못 하는 행동이 반복되면 주변 사람들은 점점 짜증을 느낍니다. 타인을 좌절시키려는 반발심과 분노가 은밀하게 작동한 것이지요.
소정님의 사연에서도 지연행동이 엿보여요. 잦은 지각, 진로에 대한 결단과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을 미루며 캥거루족으로 머무는 모습들이요. 진로탐색은 적성과 능력을 고려해서 진지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이유 삼아 죄책감 없이 부모님의 자원을 쓰는 방식으로 그 동안 쌓인 분노를 전달하고 계신 것 같아요. 문제는 억압된 분노와 지연행동이 결국 소정님의 독립과 성장까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에요. 성장기에 있었던 폭력과 방임 자체도 비극이지만, 정당한 분노를 잘 표현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경험이 부족했다는 것 역시 큰 비극입니다. 화를 건강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해 결국 소정님의 남은 인생까지 발목 잡히고 있으니까요.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소정님이 분노를 다뤄온 방식은 바꿀 수 있습니다. 덮어놓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천천히 나의 감정에 집중하며 분노의 뿌리를 찾아가보세요. 괴롭더라도 그 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뭐 때문에 화를 표현할 수 없었는지, 내가 바랐던 것은 뭐였고 그게 좌절되어 얼마나 서러웠는지 온전히 다 느껴보세요. 그래야 과거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박아름 심리상담공간 숨비 대표
※생활에 고민이 있으신가요? ‘마음 돌봄 MZ가 MZ에게’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사연 보내실 곳: esc@hani.co.kr
한겨레 기자로 짧은 기간 일했다.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임상 및 상담심리학을 공부했고, 30대 상담자로서 내담자들의 자기 이해와 발견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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