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년전 오늘] '과학도시' 밑거름 대전엑스포93…영광의 순간을 돌이켜보다

김지현 기자 2024. 8. 10.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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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엑스포93이 개막한 1993년 8월7일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들. 대전일보 DB.

"와! 반짝반짝, 신세계 같아요"

1993년 8월 7일,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의 함성이 대전시를 가득 메웠다.

30년 전 대전시 유성구 대덕연구개발특구에서 열린 대전엑스포 93은 '새로운 도약의 길'을 주제로 11월 7일까지 약 93일 동안 개최됐다. 세계 108개국과 33개 국제 기구가 참여한 국제전시관, 국내 14개 시도·19개 기업·7개 정부 기관 및 공기업이 참여한 국내전시관으로 이뤄졌으며 대한민국의 200여 개 기업이 참가했다.

개장 첫날 국내외에서 13만 8000여 명의 관람객이 몰리며 일찌감치 '성공'의 기운이 감돌았다. 결과적으로 행사 마지막 날까지 무려 14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가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면서, 총수입 4400여억 원에 254억 원 흑자라는 막대한 성과를 올렸다.

과학기술 발전과 인류의 미래를 조망하는 다양한 전시로 구성됐던 대전엑스포는, 국내·외에 대전을 알리는 귀중한 기회가 됐다. 특히 과학기술의 메카 대덕연구단지의 위상을 한껏 올려놓으며, 대전을 명실상부 '과학도시' 반열에 등극시키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대통령 1993년대전EXPO개회식참석시태양열자동차시승. 대통령기록관.

◇ 대전엑스포 93의 발자취를 돌아보다

개막식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첨단 기술이 집약된 다양한 전시관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관심을 끈 것이다. 개막식에선 대전엑스포의 상징인 '한빛탑'이 최초로 공개됐으며, 현재까지도 대전을 알리는 데 활약하고 있는 마스코트 '꿈돌이'가 새롭게 등장했다. '도우미'라는 단어의 시초도 엑스포다. 키오스크 방식의 예약 제도도 탄생했다.

경주의 첨성대 모양을 기초로 한 한빛탑은 높이 93m, 들어간 벽돌 수 1993개로 한국의 전통과 미래를 상징하는 구조물로 설계돼 엑스포의 심장이 됐다. 이름에는 '지혜로운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잇는 한 줄기 빛'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특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보이는 각종 화려한 조형물들과 더불어 투명 강화 유리 바닥으로 된 고공 전망대 등은 당시 관람객들에겐 진귀한 경험이 됐다. 현재는 전망대로 남아 시민들의 휴식을 책임지고 있다.

엑스포 공식 마스코트로 등장한 '꿈돌이'는 청년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주자는 취지에서 우주 아기요정의 모습으로 디자인됐다. 심플하면서 귀여운 디자인으로 인기가 매우 많았다. 엑스포 종료 이후 대전시의 공식 마스코트로 편입된 꿈돌이는 엑스포 당시를 추억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꿈돌이는 짝꿍 '꿈순이'와 결혼해 현재 다섯 자녀를 둔 '꿈씨 패밀리'를 일궜다. 아직도 대전을 홍보하는 일등공신이다.

엑스포의 성공에는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헌신적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도우미'라는 단어가 처음 탄생했다. 당시 도우미 선발기준은 키 160cm 이상, 나이 만 18세 이상(1975년 이전 출생자)-만 30세 이하(1963년 이후 출생자)의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미혼 여성이었다. 배우 채시라가 명예 도우미로 엑스포 홍보대사에 나서기도 했다. 폐막 후 이들은 특기를 살려 스튜어디스, 아나운서 등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지난 2005년에는 일부 도우미 출신 100여 명이 '대전엑스포 93 도우미 동우회'를 결성해 10여 년간 대전사이언스페스티벌 등지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펼쳤다가 해체, 현재는 지역 모임만 비공식적으로 남아 있다.

엑스포 기간 큰 화제를 모았던 것 중 하나는 당시 꿈돌이 안내소에서 운영되던 인터랙티브 키오스크 예약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Windows 3.1 기반이었으며, 터치스크린을 장착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개별 전시관 방문을 예약할 수 있었는데, 이는 2000년대 등장한 테마파크에서 개별 어트랙션에 대해 실시하는 예약 제도의 시초가 됐다.

꿈돌이와 꿈순이. 대전시 제공.

◇빛나는 성공 뒤 숨겨진 이면들

엑스포는 개최와 동시에 수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으며 찬란히 성공했지만, 수많은 인파로 인해 벌어진 해프닝도 적지 않았다.

개최 시점에 추석명절과 겹쳐 귀성길과 관람 차량이 뒤엉키는 '역대 최악의 교통 체증'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당시 서울에서 대전을 오가는 데만 무려 17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주차 대란도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차량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행사 현장 길목 전체를 막았고, 결국 자원봉사자들과 경찰이 나서 상황을 수습하기도 했다.

관람 인파가 몰리며 전시관 주변에서는 '먹고 마시고 노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언론 보도에선 "아침도 거르고 출입구에 진을 치는 극성도 극성이지만, 과학기술의 전시장인 엑스포장을 놀고먹는 유원지로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드믈게 전시관에 설치된 이어폰과 무선전화기가 없어지는 등의 소동도 일어났다.

당시 엑스포를 처음부터 준비해 온 조직위의 "엑스포는 그 나라의 첨단 관학과 경제 수준을 비롯해 국민 의식 수준을 평가받는 국제 시험장"이라는 말과는 대비되는 시민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대전엑스포 93 현장. 대전일보 DB.

◇'과학도시 대전' 밑거름…이제는 추억 속으로

대전엑스포는 1993년 11월 7일 밤 10시, 93일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린 가운데서도 폐막식을 보기 위해 16만 6877명이 엑스포장을 찾기도 했다.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엑스포는 대한민국이 과학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대전시를 과학기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으며, 무엇보다 도로, 하천, 교통 등 도시기반시설 확충 사업으로 대전의 발전 속도를 10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8 올림픽이 동서의 이념을 뛰어넘어 함께 어우러지는 기쁨을 나눴다면, 엑스포 93은 개도국과 선진국 간 균형 있는 발전을 꾀했다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얻어냈다.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을 책임지는 과학공원으로 남은 엑스포는, 국민들에게 신세계를 열어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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