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저씨와 키다리 아저씨 그리고 올림픽[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처음부터 개저씨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냥 애들이 좀 아프다고 해도 정신력으로 버티라고 했을 뿐입니다. 요즘 애들이 엄살이 좀 심하잖아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출장 갈 때 젊으니까 좀 불편한 좌석에 타고 가게 하는 거고요. 나이 든 사람들은 좀 편안하게 오고 가고 그런 거지요. 사람 쓸 때도 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이 더 편하고 효율적일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정성평가를 하는 거고요. 실력보다 윗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게 많거든요.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냐고요? 실무자들이 책임져야지요. 그런 일로 윗사람 문책하면 윗사람이 일을 못해요. 그 문제로 애들하고 일일이 말싸움해서 뭐하겠어요. 부딪치기 싫어서 다른 교통편 이용하는 거고요.
파리 올림픽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개저씨를 떠올렸습니다. 기대치 않았던 많은 메달로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해준 젊은이들, 기뻐할 사이도 없이 염장을 지르는 각종 협회의 아저씨들.
이 파장이 생각보다 큰 것은 개저씨 프레임과 연관돼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흑수저론까지 한국 젊은이들을 지배하고 있던 정서는 ‘체념’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략 8, 9년 전 개저씨란 단어가 등장한 이후 그 정서는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이브와 민희진 사태에서도 개저씨 프레임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배경입니다.
부상을 극복하고 금메달을 딴 22세 젊은이와 그를 메달 사냥의 도구 취급하며 비즈니스석을 타고 돌아다닌 아저씨들. 사실관계가 약간은 달라질 수 있어도 이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양궁을 돌아보면 세상이 꼭 그 방향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보입니다. 작년 말 정의선 양궁협회장의 연설을 볼까요.
“어느 분야든 최고라는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지만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십 년 세계양궁을 지배한 한국 양궁, ‘이 전통을 자칫 내가 무너뜨리면 어떻게 하나’란 대표선수들의 심리적 부담을 이해한다는 공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인사말은 이어집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공정하게 경쟁했는데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도 괜찮습니다. 보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품격과 여유를 잃지 않는 진정한 1인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국가의 품격을 높이고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안겨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포츠의 가치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말 한국양궁 60주년 행사에서 한 말입니다. 그로부터 8개월 후 선수들은 그 압박감을 이겨내고 양궁에 걸린 올림픽 금메달 5개를 모조리 가져왔습니다.
금메달을 딴 후 인터뷰에 응한 정 회장은 “제가 선수들에게 얹혀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들 잘 좀 찍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대회장을 빠져 나갔습니다.
메달을 딴 선수들도 기자회견에서 정 회장에 대한 감사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공감, 이해, 지원, 여기에 하나 더 공정이 있었습니다. 양궁은 오로지 점수로만 국가대표를 뽑았습니다. 직전 올림픽 3관왕도 한국에서 TV로 경기를 봐야 했습니다. 학벌, 명성, 인맥 따위가 치고 들어올 공간은 없었습니다.
양궁협회는 선수들의 심리적 안정과 결정적 순간 차분한 마음을 가질수 있도록 뇌과학자까지 초청해 훈련시켜 줬습니다. 그들의 심박수는 비정상적으로 낮게 나왔고, 손을 떠난 활을 10점 과녁에 꽂혔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리는 배경입니다.
오래전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한국인 사병에 일본인 하사관, 독일인 장교, 그리고 미국인 장성으로 편성한다면 세계 최고의 군대가 될 것이다.”
미국은 전략, 독일은 전술, 일본은 매뉴얼에 강하기 때문에 나온 말인 듯합니다. 한국의 사병을 지목한 건 그만큼 한국인, 특히 젊은이들 개개인이 우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이 우수한 젊은이들을 이끌고 강한 국가를 만들었고, 능력 없는 지도자는 나라를 말아먹다시피 한 적도 있었던 게 한국의 어제와 오늘입니다. 국가, 기업, 스포츠 조직, 아니면 부서 하나를 이끌고 있는 아저씨들에게 올림픽이 던지는 질문인 듯합니다.
‘나는 개저씨일까, 키다리 아저씨일까. 최악은 자신이 키다리 아저씨인 줄 아는 개저씨라는데…’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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